그날 의무헬기 '메디온' 왜 못 떴나…골든타임 놓친 훈련병 사건 [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최전방 감시초소(GP)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한 병사가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 당직사관이 사령부에 구조 헬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사령부는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며 구조 헬기의 대기를 지시했다. 그러는 동안 총상을 입은 병사는 “살려달라고, ××”이라며 욕설 섞인 비명을 지르더니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병영 부조리를 다룬 드라마 ‘D.P.’ 시즌 2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에선 군사경찰 장교가 총기 난사범 재판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명령을 기다립니다. …휴전선이 코앞에 있는 최전방 부대. 인계선 상공에 구조 헬기를 띄우는 데에는, 사령부의 허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현장을 전혀 모르는 그 사령부의 명령이란 게 때로는 얼마나 길고 늦은 기다림이 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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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병 무리한 군기훈련 사망
인근에서 메디온 대기했지만
출동 안 돼서 큰 병원 못 보내
철저한 수사 통해 경위 밝혀야
」
그의 넋두리는 극적 전개를 위한 드라마의 장치만이었을까. 아니다. 안타깝게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암울했다. 육군 제12보병사단 훈련병 사망 사건 말이다.
5월 23일 12사단 신병교육대(신교대)에서 훈련병이 가혹한 군기훈련을 받던 중 쓰러진 뒤 5월 25일 숨졌다. 중대장과 부중대장이 규정을 위반하고 무리한 얼차려를 지시한 게 원인이었다.
이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 요구와 함께 이 같은 비극이 더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규정을 고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지난 4일엔 국방부 앞에서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사귀환 부모연대’ 등이 집회를 열고 “우리 아이들 그만 죽여라”고 외쳤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엔 ‘재발 방지를 위한 규정과 법 제정에 관한 청원’이 올라와 12일 현재 3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 다음 달 7일까지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소관위원회 심사 대상이 된다.
의무후송 헬기 8대, 24시간 대기
군대라는 이유로 잘못된 문화를 용인한 군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사안이 있다. 의무후송 헬기인 메디온이 사고 당일인 5월 23일 왜 뜨지 않았을까다.
메디온은 최대 중증환자 2명을 한꺼번에 상급 병원으로 옮기는 헬기다. 육군의 기동헬기인 KUH-1 수리온을 개조해 심실제세동기·인공호흡기·정맥주입기 등 응급처치(EMS) 키트와 악천후에도 비행할 수 있도록 돕는 기상 레이더, 헬기 착륙이 어려운 지역에서 환자를 끌어올리는 호이스트를 달았다. 웬만한 병원 응급실보다 더 나은 장비를 갖췄고, 응급의학과 전문의 군의관과 응급구조사가 함께 탄다.
2020년 모두 8대의 메디온이 의무후송항공대에 배치돼 명령이 떨어지면 15분 안에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대기 중이다. 의무후송항공대는 지금까지 많은 인명을 구했다. 그런데 왜 5월 23일은 그러지 못했을까.
12사단 사건으로 되돌아가 보자. 사고 훈련병은 신병교육대(신교대) 군 의료진의 신속한 처치로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신교대가 국군의무사령부 의료종합상황센터에 향후 방침을 문의했다. 국방 환자관리 훈령에 따르면 ‘의료종합상황센터는 환자 상태를 고려해 후송병원을 선정하고, 항공의무후송 수단을 결정 및 지원한다’고 돼 있다.
훈련병의 부모는 국군수도병원으로의 후송을 요구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40㎞ 거리의 민간 병원인 속초의료원으로 이동했다. 속초의료원에서도 훈련병의 상태는 호전되지 못했고, 신부전이 나타났다. 신장 투석을 해야만 했는데, 속초의료원엔 신장투석기가 없었다. 그래서 훈련병은 68㎞ 떨어진 강릉아산병원으로 전원됐다. 훈련병은 곧 의식을 잃었고, 25일 오후 급성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방부는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이라며 후송 과정에 대해 말을 아꼈다. 중앙일보 취재 결과 메디온 출동 검토는 속초의료원→강릉아산병원에서만 있었고, 당시 의료종합상황센터는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의 항공 후송이 강릉아산병원으로의 육로 후송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판단을 내렸다.
응급환자 후송 체계 제대로 작동 못 해
그러나 다른 얘기가 들린다. 의무후송항공대는 훈련병이 신교대 의무대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을 때부터 이를 인지하고 신교대와 멀지 않은 기지에서 출동을 준비했다. 신교대와 12사단뿐만 아니라 상급 부대인 육군 제3군단에서도 항공 후송을 요청했다는 의혹도 있다. 익명을 요구하는 관계자는 “현장에서 ‘군 응급환자 신고’란 모바일 앱에 정보를 입력하면 의료종합상황센터가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사실상 신고와 함께 메디온 출동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훈련병이 처음부터 메디온에 태워져 국군수도병원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강릉아산병원으로라도 보내졌으면 어땠을까. 훈련병의 생명을 건졌을 것으로 보인다. 2023년 8월 전술 행군 중 실신한 육군특수전사령부 최재혁 중사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생존확률이 1%도 채 안 됐지만, 군 당국의 집중 치료 덕분에 기적적으로 부대에 복귀했다.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은 후송도 비결이었다고 한다.
보훈 전문의 안종민 행정사는 “12사단 사건을 보면 고 홍정기 일병 사건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홍 일병은 2016년 급성백혈병 때문에 상급 병원으로 보내져야 했는데 이를 막은 대대장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홍 일병의 어머니가 통화에서 ‘어쩜 이렇게 정기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냐.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거리에 나가 응급환자 후송과 의무후송 헬기를 요구했는데 헛수고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12사단 훈련병의 꽃다운 청춘을 희생한 대가이지만, 군의 문화를 고치면서 응급후송 체계도 다시 손 봐야 한다.
그에 앞서 경찰은 후송이 적절했는지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그런데 사건 16일 만에 중대장·부중대장을 형사입건한 경찰에게 ‘신속한 정의’를 바랄 수 있을까. 지난해 7월 19일 발생한 해병대 1사단 채 상병 사망 사건도 1년 가까이 해결하지 못한 경찰이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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