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뼈 시리게 춥다”…죽느냐 사느냐보다 묵직한 끝마디
“춥다! 뼈가 시리게 춥다!”
배우 박정자의 탄식에 온몸이 곤두섰다. 어수선했던 객석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품 하나 없는 단출한 무대에 어두운 조명, ‘연기’ 하나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고 작심한 듯 연극 ‘햄릿’(연출 손진책)의 막이 올랐다.
연극 ‘햄릿’은 원작과 도입부가 다르다. 원작에서는 중반부에 등장하는 배우1·2·3·4가 연극에서는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수미상관 형식의 시작과 끝에서 이들이 전하는 대사는 “어둡다, 어두워”, “춥다. 뼈가 시리게 춥다” 외 몇 줄 뿐이지만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선왕이 살해당하며 시작된 죽음의 향연이 끝난 후 박정자가 다시 한번 “뼈가 시리게 춥다”고 외쳤을 때 그는 ‘작은 배역은 없다’는 연극의 금언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지난 9일 개막한 연극 햄릿은 ‘문화재급’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제가 됐다. 연극계 원로인 전무송, 이호재, 박정자, 손숙, 남명렬부터 중견 배우 길용우, 김성녀, 전수경, 아이돌그룹 에프엑스 출신 루나까지 24명의 배우가 장장 3개월간 공연을 이끈다.
최고령인 이호재·전무송은 83세, 최연소 루나는 31세다. 연출가 이해랑(1916~1989)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16년 선보인 작품으로, 초연(2016)·재연(2022)·삼연(2024)이 모두 손진책 연출의 손을 거쳤고 매 시즌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던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다.
극작가 배삼식은 셰익스피어 원작을 맛깔나게 살렸다. ‘배우1’을 맡은 박정자와 함께 등장하는 이항나·정경순·손봉숙(배우2·3·4)은 사제처럼 관객을 죽음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이제 산 자는 잠에 들고” “죽은 자 눈을 뜨는 때” “깊은 물로부터, 타는 불로부터” “무언가 떨어져 나온다. 어릿어릿, 희뜩희뜩!” 등 펄떡이는 대사에 대배우들의 연기 공력이 더해져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다.
2022년 재연에 이어 두 번째로 햄릿에 도전한 강필석은 방황하는 젊음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숙부 클로디어스를 향한 분노에는 슬픔과 절망, 죽이려는 마음과 주저하는 마음이 뒤섞여있다.
거트루드(햄릿의 어머니)의 대사처럼 “온통 죽음 뿐인” 어두운 극이지만 유머러스한 장면이 적지 않다. 특히 극 중 극 형식으로 햄릿과 거트루드, 클로디어스 앞에서 연극을 올리는 배우들이 남편이 죽은 뒤 그의 친동생(클로디어스)과 재혼한 거트루드를 나무라듯 “돌아가신 남편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호통을 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기로 시작해 연기로 끝나는 극이다. 모든 대배우가 탐을 냈다는 ‘무덤 파기’ 역의 김재건은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천하를 떨게 하던 시저 황제도 결국 흙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했다. 클로디어스 역의 길용우는 형을 죽인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도 “살아야겠다!”며 눈을 희번득였다. 연출도 무대 장비와 음악 사용을 최소화해 관객이 연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했다.
공연은 9월 1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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