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화가 김기린, 1970년 한국 단색화의 ‘시작점’ 찍다

손영옥 2024. 6. 12.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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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무언의 영역’ 展
한 관람객이 최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한 김기린 개인전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재불화가인 김기린은 1970년 검은색 단색화를 처음 선보인 이후 단색의 캔버스에 무수히 작은 점을 찍어 채우는 작품을 지속해서 그려왔다. 점이 만들어내는 공명 때문에 그의 작품 세계는 ‘점으로 찍은 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갤러리현대 제공


서울 종로구에 있는 메이저 상업화랑 갤러리현대에서 고(故) 김기린(1936∼2021·아래 사진) 작가의 개인전 ‘무언의 영역’을 한다. 이곳에서 개인전을 하기는 2016년 이후 처음이다.


작가 작고 후로는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갤러리현대는 ‘단색화의 선구자’라는 표현을 과감히 써서 눈길을 끈다. 8년 전 전시에서 단색화의 경향과 차별되는 고유성을 강조했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다.

단색의 추상화를 뜻하는 단색화는 2012년 이후 한국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통했다. 1975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5인의 한국 작가들, 다섯 가지 흰색’전이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경향인 단색화의 시발점이 됐다는 게 학계에서는 정설로 통한다. 전시를 주도한 박서보와 일본에서 이를 연결한 재일화가 이우환을 위시해 하종현, 권영우, 윤형근, 정상화 등이 대표작가로 꼽힌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김기린의 1970년 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선의 맨 처음에 걸어 ‘단색화 선구자’를 강조하는 구성을 했다. 이 작품은 사각의 캔버스 안에 작은 사각형을 넣은 검은색 모노크롬 회화이다. 그는 1972년 파리 루스판스키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검정 사각 안에 작은 크기의 검정 사각 혹은 흰 사각, 빨강 사각이 들어간 연작을 전시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이 전시는 단색화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1975년 도쿄 ‘다섯가지 흰색’전보다 시기적으로 빠르다. 전시장 2층에는 이 기사에 관한 아카이브 자료도 전시했다.

재불화가 김기린의 독특한 이력을 살펴보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1961년 말라르메, 랭보 등 프랑스 시인에 반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디종대학교에서 불어로 시를 쓰는 것에 한계를 느낀 김기린은 미술사와 미술 실기를 청강했다. 재학시절인 1965년 가진 첫 전시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를 정식 졸업한 뒤 미술품 복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그가 화가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김기린은 초기에는 한국의 산세를 연상시키는 원색의 색면 추상을 선보였다. 그러다가 1970년을 기점으로 검은색 위주의 모노크롬(단색)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안과 밖’ 등 작품 제목이 시사하듯 이 연작들은 ‘비가시적인 것에 가시적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회화론에 영향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2016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는 당시의 검은색 회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작품 세계가 흰색에서 출발한 ‘토종 단색화’와 차이가 나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전시에서 갤러리현대가 단색화와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을 강조하는 배경은 모르겠다. 어쨌든 김기린이 단색화 선구자임을 주장하는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무수한 행위의 반복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김기린은 격자 안에 무수히 점을 찍는 회화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뉴욕 시절 전면 점화를 그린 1세대 추상화가 김환기를 연상시킨다. 김환기가 면천에 무수히 작은 점으로 번짐의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수묵의 번짐 효과를 연상시킨다면 김기린은 캔버스에 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그런 효과는 없다. 다만 “기름기를 뺀 유화의 느낌을 추구”함으로써 유화 특유의 번들거림과는 거리를 둔다. 또 작은 점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으로 찍은 듯 한 지문 크기라는 점에서도 김환기와 차이가 난다.

전시는 ‘점으로 찍은 시(詩)’의 향연 같다. 멀리서 보면 검은색, 빨간색, 주황색 등의 단색 추상화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 안에 격자를 그은 뒤 채워 놓은 무수한 점이 있다. 한 개, 두 개, 세 개, 3000개. 이렇게 반복하다 보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1∼2년이 걸리기도 한다. 김기린의 작품 유통 물량이 많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톤온톤처럼 어두운 바탕색 위에 더 밝은색으로 점을 찍은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단색화의 특징과 관련, 수행적인 행위의 결과물로서 화면에 촉각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2012년 단색화 전시를 기획해 이를 유행시키는데 일조한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규정지은 바 있다. 김기린의 점찍는 행위는 단색화가 갖는 속성인 수행성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김기린이 멀리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국내 단색화 유파의 좌장격인 박서보는 일본 도쿄 등의 전시에 김기린을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 함께 참여시키기도 했다. 추진력과 정치력으로 마초라는 평가까지 들은 박서보는 지난해 타계했다.

이번 김기린 개인전의 제목이 ‘무언의 영역’인 것은 사이먼 몰리가 쓴 에세이 ‘무언의 메시지(undeclared message)’에서 땄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국 출신 화가이자 ‘모노크롬’이라는 책을 쓴 몰리는 “김기린은 문학을 전공해 그런지 작업이 지적이며 정통적(classic)”이라며 “(단색화는) 미학으로는 김기린이 먼저이며 영향력으로는 박서보가 크다”라고 평가했다. 7월 14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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