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의사 면허는 무제한의 봉건적 특권 아니다
국가가 인정한 전문 자격증을 특별 대우받는 권리로 착각해
특권의식 맘껏 뿜어내기 앞서 스스로 만든 윤리규정 지켜야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 감옥을 열어젖혔다는 ‘혁명 1보’가 전해진 1789년 7월의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였다. 지방의 영지로 탈출한 귀족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군대가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냈다. 귀족들의 가혹한 보복이 임박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자 농민들은 스스로 무장했다. 2주쯤 지나 7월 말이 되자 농민봉기는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됐다. 곳곳에서 귀족이 사는 성과 수도원이 습격을 받아 불타올랐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끝낸 ‘8월 4일의 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프랑스의 상황은 이랬다. 이날 국민의회 안건은 배고픈 농민에게 빵을 나눠주는 빈민구제였지만 인권론자인 루이 마리 노아유 백작의 연설로 반전이 일어났다. 그는 농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씩 나열하며 봉건적 야만주의를 없애자고 호소했다. 이어 누군가 수도원의 횡포를 비난했고, 발끈한 한 주교가 귀족의 독점사냥권을 폐지하라고 맞섰다. 새벽 2시까지 계속된 회의에서는 당시 프랑스에 존재했던 귀족과 성직자의 거의 모든 특권이 성토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나온 게 8월 법령 19개 조항이다. 핵심은 왕과 귀족, 성직자의 특권 폐지다. 법령 2조는 ‘새가 풀을 뜯을 권리를 허용한다’였다. 당시 평민은 자기 집에서 새를 잡아도 세금을 내야 했다. 귀족의 영지에서 무엇이든 먹었을 테니까. 교구 안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강제 부과한 가톨릭 교회의 십일조도 폐지됐다. 9∼10조는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시민은 동일한 세금을 납부한다’였다. 귀족, 성직자, 평민에게 각각 적용되던 법을 없애고 모든 사람에게 한가지 법을 적용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사람들도 봉건제의 붕괴는 불평등한 특권을 폐지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후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8월 법령의 정신을 제도화한 근대 국가가 속속 등장했다. 그 결과 몇몇 국가의 예외적 왕정을 제외하면 어느 사회도 봉건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종과 성별을 이유로 차별하거나, 특별하게 대접하면 부끄럽게 생각한다. 출생 이전에 부여된 신분 대신 인간이라면 누구나 천부적으로 갖는 보편적 권리를 존중한다. 그러면서 특권이라는 말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력에 의해 획득한 권리를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국가 또는 권위를 가진 단체가 특정한 집단에게 부여하는 제한적 권리라는 법률적 용어로 기능하게 됐다.
비행기를 탈 때 돈을 더 내면 일등석 서비스를 이용하는 건 자본주의에서 인정되는 특권의 대표적인 예다. 특정인에게 편의와 우월감을 제공하는 대신 다른 승객들은 그만큼 싸게 이용한다는 합의의 결과다. 국가가 인정한 면허 역시 합의된 특권이다. 전문 자격증은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다. 의사, 변호사, 건축사 등 면허를 가진 전문가들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구성원의 건강과 안전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투자한 노력에 상응하는 배타적인 권리 행사를 특권으로 인정받는다. 의사 면허 없이 의료행위를 하면 엄하게 처벌하는 건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일등석 고객이 비행기에서 내린 뒤에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처럼 전문적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행사되는 면허의 특권도 용인되지 않는다. 제한적 권리가 특권의 속성이라는 건 상식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이런 법률적 의미의 특권과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사라진 봉건적 특권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기 시작했다. 중·고교 학업성적을 출생 전에 부여된 신분으로 생각하는 착시 현상도 만연해 있다. 그러다보니 면허를 획득한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나서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회규범으로부터 예외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심지어 봉건시대 귀족들처럼 자신들에게는 평민들과는 다른 별도의 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지금은 의사들이 그런 착각 속에 특권의식을 마음껏 뿜어내지만 과거에는 변호사들이 그랬고, 미래에는 어떤 전문가 집단이 그렇게 행동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의 특권은 그가 속한 집단이 스스로 만든 윤리규정을 지키는 데서 출발한다. 현대의 직업적 특권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중세 귀족의 봉건적 특권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류가 200년 전에 깨달은 사실을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는 것은 곤란하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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