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기업의 위기의식과 정치권의 위기의식

2024. 6. 1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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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지금 세계는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문명의 대전환이 예고되고, 신자유주의 질서의 붕괴로 글로벌 밸류 체인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북한과 러시아의 연대 등 국제질서도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대전환의 큰 흐름에서 각국은 자국 산업 보호에 필사적이다. 트럼프는 11월 대선에 승리하면 중국 상품 수입에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위기에 미국 의회가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lley Tariff Act)을 통과시켜 유럽에 평균 60%, 최고 400%까지 관세를 부과하는 보호무역 정책으로 대공황의 폐해가 더욱 악화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 물결 속
기업들은 위기감 갖고 ‘딥 체인지’
정치권의 관심은 국내 문제 함몰
사회 패러다임 대전환 고민해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유세 연설 모습. 트럼프 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 승리하면 중국 상품 수입에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은 소위 칩스법으로 자국 내 반도체 구축망을 위해 73조원을 지원하고 향후 전 세계 반도체의 20%는 미국 본토에서 생산하게 만들려고 한다. 중국도 반도체 굴기를 위해 65조원에 달하는 3차 반도체 펀드를 조성했다. 일본도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도요타 등 8개 기업이 연합해 만든 라피더스에 8조원 이상을 지원하고, 구마모토에 유치한 TSMC 제1공장에 4조원 이상을 지원하는 등 총 35조원 이상의 지원 예산을 확보했다.

이런 변화의 물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역협회는 지난해 우리 경제성장률에 수출의 기여도는 86.1%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국내 스타트업의 수출도 2017년에 비해 9배 늘어 약 3조3000억원으로 연 평균 48.3%의 성장을 보였다. 수출주도 경제에서 기업은 나름대로 생존 전략을 만들며 위기대응을 하고 있지만 정치권의 위기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도체는 우리나라 1위의 수출품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약 20%를 담당한다. 2021년 우리나라 1975개 상장사가 납부한 총 법인세 34조원 중 삼성전자가 7조7335억원, SK하이닉스가 3조5632억원을 납부했다. 2023년 반도체 불황으로 이들 두 회사가 법인세를 납부하지 못하자 전체 국가재정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공사 진행 중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 모습. 반도체 생산의 핵심요소인 용수와 전기공급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건설 추진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도 반도체 육성법을 통과시켰지만, 보조금 지원은 대기업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여론에 밀려 금융지원과 세제 혜택만 지원하고 있다. 게다가 반도체 생산의 핵심요소인 용수와 전기공급이 지역이기주의로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삼성전자가 300조원, SK하이닉스가 122조원을 투자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추진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반도체 전기공급을 위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안과 반도체 기업 세제 혜택 기한을 연장하기 위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도 발의되었지만 결국 통과되지 못한 채 21대 국회는 막을 내렸다. 정치권의 위기의식은 실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 선조는 황윤길을 상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1586년 일본 전역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의도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오만한 히데요시의 영접을 받고 일 년 만에 돌아온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전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는 상반된 보고를 했다. 『징비록』을 보면 만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어쩌려고 그런 보고를 했느냐고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직접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성일의 대답은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도 강경해서 잘못하면 나라 안 인심이 동요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내 정치를 위해 국제 정세를 무시한 결과는 다음 해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대참사를 초래했다.

지난 6월 5일 첫 본회의를 열어 정식으로 22대 국회를 개원했지만 여당인 국민의힘은 불참했다. 여당 불참 속 야당 단독으로 국회가 개원한 것은 헌정 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설치된 교통표지판과 개원 축하 현수막. 연합뉴스

4·10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하고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 단독으로 22대 국회가 개원되었다. 원 구성 협상은 여야의 극한 대치로 난항에 빠져있고 정치권은 특검 논쟁, 기내식 비용 문제 등에 빠져 정쟁만 일삼고 있다. 여야는 국정을 고민하기보다는 극성 지지자들을 활용하여 붕당정치만 이끌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임기 4년 동안 국회를 통해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여야 어디에서도 비전이나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에 비치는 정치인들의 논쟁은 서로 꼬투리 잡고 비난하는 가십거리에 그쳐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 정치인 중에 큰 정치를 하고, 미래 비전을 이야기하고, 구체적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정말 없는가?

기업은 위기의식을 감지하고 딥 체인지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위기의식은 국내 정치에 함몰되어 있다. 기업인이 화두를 던진 “대한민국, 이대로 가도 괜찮은 겁니까?”라는 질문이 정치인들에게서도 나와야 한다. 뺄셈 정치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해 승리를 쟁취하려는 붕당정치는 청산하고 우리 사회 패러다임 대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22대 국회가 되어야 한다. 정치권의 위기의식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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