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보길
늘 하던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 시간이 내게도 힘이 될 것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을 보기로 한 건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맡았다고 들어서였다. 제목에 ‘인생’이 들어가는 영화의 각본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니.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지만 곧 그가 각본을 맡은 게 아니라 각색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본 적은 없더라도 제목은 익히 아는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등을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가 원작이라고 했다. 왜 이 영화를 각색했는지 알고 싶어 유튜브에서 인터뷰를 찾아봤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이 영화의 메시지에 따라 살아왔어요.” 한 사람의 평생에 영향을 미친 영화라니. 기대감이 더 커졌다.
영화의 설정은 낯설지 않았다. 런던 시청 공무원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한 남자에게 어느 날 찾아온 시한부 판정. ‘남아 있는 나날’이 얼마 없음을 알게 된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는 작품은 수없이 많았기에 이런 영화는 어느 정도 익숙하게 보게 될 터였다.
수십 년 전 맞춰놓은 벽시계 시침처럼 매일을 똑같이 살아온 윌리엄스.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걸 알게 된 그는 남은 시간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해보기로 한다. 인생을 즐기는 것. 하지만 낯선 이와 밤새도록 놀고 마시고, 우연히 만난 시청 직원 마거릿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해보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의미도 없다.
그가 죽기 전 바라던 건, 살아 있는 기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자신이 즐기는 방법을 모르듯 살아 있는 방법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거릿을 또 찾은 거였다. 밝은 그녀의 살아 있음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끝에 자신에게도 살아볼 기회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후반부는 윌리엄스가 죽기 전까지 했던 일들이 동료들의 기억을 통해 전해진다. 다시 시청으로 돌아간 윌리엄스는 긴 시간 시청 내에 표류 중이던 민원을 꺼내 든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민원. 민원을 되살리던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작은 기적이 행해지는 것처럼 관객의 눈에 전개된다. 그가 죽을 줄 몰랐던 동료들은 놀라운 마음으로 그의 걸음을 쫓고, 그를 보며 어렴풋이 무언가를 느낀다. 동료들처럼 관객들도 어렴풋이 무언가를 느낀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의 행동이 실은 매우 중요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영화를 다 보고 가즈오 이시구로가 평생을 따라왔다는 메시지가 무얼지 생각해봤다. 윌리엄스가 민원을 해결하며 보여주려던 것. 윌리엄스는 죽기 전 엄청 대단한 일에 뛰어들지도,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며 새로운 곳을 찾아가 극적인 일에 투신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늘 하던 일에서 하나를 찾아내 사소한 그 일을 최선을 다해 책임지고 처리했다. 달라진 건 그 일을 대하는 마음 하나뿐.
윌리엄스의 마음은 후대를 향해 있기도 했다. 단지 자신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살아갈 이들의 삶도 고려해보는 것.
나는 무엇보다 이 영화가 다음 세대를 향해 따뜻한 지혜를 남겨주어 좋았다. 내 앞에 놓인 작은 일에 마음을 써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윌리엄스는 시청 후배 직원에게 편지를 남겨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어떤 목표를 위해 매일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오면, 무엇보다 일상에 지쳐 오랜 시간 내 발목을 잡았던 그런 상태로 당신도 움츠러들면, 우리의 작은 놀이터가 완성된 순간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그 시간이 미래의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황보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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