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시선] 노장은 죽지 않는다
배우 신구는 1936년생, 88세다. 박근형은 1940년생, 84세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 중인 베테랑 배우들이다.
80대 노장들의 열연이 놀랍다.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대사의 티키타카가 130분 동안 이어진다. 중간에 20분가량 인터미션이 있다고는 해도 2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경이롭다. 긴 대사도 대사지만, 기름기를 쫙 뺀 무미건조한 말투로 감동을 자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두 배우의 나이를 합치면 172세다. 1953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이 연극 역사상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령 배우의 조합일 것임이 틀림없다. 역대 최고령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다. 연극이 끝난 뒤 롱런 비결을 여쭤봤더니 노배우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하는 거지요, 뭐. 배우가 대사를 못 외우면 그만 해야지.”
■
「 88세 배우 신구의 연극 열연
54세 프로골퍼 최경주의 도전
베테랑의 집념과 품격 보여줘
」
야구감독 김성근은 1942년생, 82세다.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에서 최강 몬스터즈를 이끌고 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펑고’ 배트를 들고, 선수들에게 혹독한 수비 훈련을 시킨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 한마디에 글러브를 낀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는 말한다.
“나이를 먹었다 해도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어. 시선은 늘 앞으로, 미래로.” (『인생은 순간이다』 김성근 저, 다산북스)
지난달 베테랑 골퍼 최경주가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조카뻘 후배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5월 19일, 그의 54번째 생일이었다. 연장전은 기적 같았다. 한 편의 드라마, 감동의 영화였다. 열세 살이나 어린 후배보다 티샷 거리가 30~40m 정도 짧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통증을 참아내면서 죽으라고 클럽을 휘둘렀다. 후배들이 쇼트 아이언을 잡을 때 그는 3번 우드를 휘둘렀다. 그 열패감을 딛고 최경주는 다시 일어나 남자 프로골프 역대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웠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20, 30대 후배들과 정면 대결을 펼쳐서 이겼다는 점에서 최경주의 우승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자세, 도전 정신이다.
최경주는 2000년 PGA투어에 데뷔한 뒤 통산 8승을 거둔 베테랑이다. PGA 투어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24년 동안 그는 498차례의 대회에 출전해 337번이나 컷을 통과했다. 골프 대회에 나가서 예선을 통과한 비율이 67%를 넘는다는 뜻이다. 10위권 이내에 들어간 것도 68차례나 된다. 톱10 진입 비율이 13%다. 대회에 열 번 참가하면 일곱 번은 예선을 통과하고, 한 번은 10위권 이내에 들었다고 보면 된다. 24년 동안 그가 벌어들인 상금은 3280만3596달러. 우리 돈으로 451억7055만원이다. 한마디로 맨땅에서 시작해 운동으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최경주다.
그런데 54세의 나이에도 최경주는 멈추지 않는다. ‘탱크’라는 별명대로 여전히 그의 모토는 ‘돌격 앞으로’다. 낯선 미국 땅에서 24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가 겪은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2018년, 그는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수술 이후 한동안 수척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이제 50대 중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도 많아졌다. 은퇴해서 편안한 삶을 즐기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그러나 최경주는 여전히 필드 위에서 도전을 즐긴다. 50세 이상의 골퍼만 출전할 수 있는 챔피언스 투어에서 외국 선수들과 샷 대결을 펼친다. 다른 선수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아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최경주는 체육관에서 바벨을 들고 구슬땀을 흘린다.
최경주는 자기 절제의 화신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이불 속에서 담배부터 찾았던 애연가였지만,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은 지 오래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더구나 콜라와 커피까지 끊었다니 구도자의 삶이 이런 건가 싶다. 그는 오늘도 수도승 같은 몸가짐으로 필드 위에 서 있다.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비바람 속에서도 샷 대결을 펼친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나이에 작은 성취에 도취해 은퇴를 선언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선배의 자세는 귀감이 된다.
투철한 직업윤리와 끊임없는 도전 정신이 베테랑 선배들이 가르쳐 준 교훈이다. 80대의 레전드 배우 신구와 박근형, 그라운드를 호령하는 야구 감독 김성근과 50대 중반의 현역 골퍼 최경주가 몸소 그걸 말해주고 있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정제원 문화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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