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초여름의 싱싱한 일상을 주세요
비가 다녀가더니 벌써 초여름의 기운이 왕성하다. 텃밭의 작물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고랑과 이랑은 어느새 먼 바다처럼 푸른빛이 출렁인다. 풀도 우거졌다. 방울토마토의 위쪽 순을 지지대에 한 번 더 묶어주었다. 오이도 곧 딸 것 같다. 처음 열린 오이를 발견하고선 첫 수확을 할 아침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침에 정작 마주한 것은 이빨 자국이 나 있는, 반쯤 잘린 오이였다. 누군가 밤사이에 오이를 갉아먹고 간 것이었다. 들고양이가 그렇게 해놓은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동네에는 초당 옥수수를 따는 집이 있다. 초당 옥수수는 이즈음에 즐기는 별미다. 옆 동네에 사는 지인이 고향 집에서 참외를 보내왔다며 내 집에 갖고 왔다. 돌아가는 길에 산딸기 잼을 한 통 손에 쥐여 보냈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참외는 내 옆집과 또 나눴다. 그러자 이웃 사람은 내 집에 새콤한 매실을 두고 갔다. 매일매일 해가 질 무렵에 생각하길,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하루를 살았구나, 하는데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루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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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외, 잼, 매실 나누는 이웃들
큰 감동 준 우체부 세심한 배려
아무 일도 없는 하루는 없어
」
이하석 시인은 한 산문에서 “삶은 때로 자연과 만나 들뜨거나 가라앉는다”면서 “내가 자연과 친할 때, 또는 ‘우리’가 서로 받아들여질 때 나는 새로 호명된다”고 썼다. 초여름의 자연은 설렘과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일례로 재작년에 5일장에 가서 로즈메리를 사서 마당 한쪽에 심었는데 그동안은 자라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더니 이 초여름에 이르러선 부쩍 그 품과 높이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로즈메리의 잎에 손이 살짝 닿기만 해도 손으로 다 움켜쥐지 못할 정도로 많은, 움직이는 향기를 얻을 수 있다.
요즘엔 최승호 시인의 동시집 『부처님의 작은 선물』을 아껴가며 읽고 있다. ‘연잎 위에서’라는 제목의 동시는 이러하다. “연잎 위에/ 넙죽/ 엎드려서/ 금개구리가 아침 해에 절을 합니다// 해님/ 묵은 햇빛 안 주셔서 고맙습니다/ 날마다 싱싱한 햇빛만 주세요” 평평한 연잎 위에는 금개구리 한 마리와 눈부시게 쏟아지는 아침의 싱싱한 햇빛이 있다. 새날을 받으며 금개구리는 감사의 절을 한다. 금개구리에겐 연잎이 바로 법당인 셈이다. 만족을 알게 하고, 고마움을 알게 하고, 개구리 스스로 금빛으로 빛나는 귀한 존재임을 알게 하는 마음의 법당인 것이다. 나도 금개구리처럼 초여름의 싱싱한 아침을 받으며 산다.
열흘 남짓 후면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미리 해야 할 일도 적지 않다. 자라는 풀을 한 차례 뽑거나 낫으로 베야 한다. 이 일을 하지 않고서 장마를 보내고 나면 그 이후로는 풀을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면 아버지께서 유월의 날들에 논둑이나 밭둑에서 풀을 베 지게로 풀짐을 지고 집으로 오셨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장화와 비옷도 하나 새로 살 생각이다. 농기구의 부러진 나무 손잡이도 갈아 끼워야겠다. 작년에 해바라기들이 섰던 터에 씨앗이 떨어져 해바라기가 크고 있는데,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 어린 해바라기를 떼어내 여기저기에 옮겨 심는 일도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노랗고 둥글고 건강한 해바라기를 팔월에 보기 위해선 어쩌면 지금이 해바라기를 옮겨 심어 가꿀 마지막 기회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는 없을 테다. 그리고 어떤 일은 일어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게 한다. 며칠 전 비가 내리던 날 택배 물건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나갔더니 물건만 툇마루에 남아 있었는데, 빗방울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물건을 덮어놓고 가셨다. 큰 비닐을 미리 일일이 잘라서 갖고 다니면서 낱낱의 물건을 배달할 때에 그 비닐로 빙 감싸서 내려놓고 가셨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우편집배원이 다녀가셨는데, 그날은 바람이 많은 날이었다. 나갔더니 툇마루에 우편물이 있었고, 우편물 위에는 작은 돌 두 개가 얹혀 있었다. 내 집 흙마당의 돌 두 개를 주워 우편물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 놓은 것이었다. 배려의 마음이 느껴져 큰 감동을 받았다.
장마가 와서 여러 날을 머물겠지만, 장마 속에서도 은하(銀河) 같은 수국은 피고, 그 장마가 지나가고 나면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다. 나는 큰 그릇을 들고 싱싱한 아침 햇살에 감사해 하며 텃밭에서 붉은 방울토마토를 따고, 오이를 딸 것이다. 막 딴 개복숭아를 물에 씻어 한 입 베어 물 수도 있을 것이다. 풀을 뽑으며 목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칠 것이다. 그리고 택배 물건을 배달하는 분과 우편물을 배달하는 분이 비닐로 감싸놓고, 작은 돌로 눌러 놓고 간 산뜻한 여름의 소식을 두 손으로 감격해 하며 받아들 것이다. 나는 연잎 위의 금개구리처럼 중얼거린다. 싱싱한 일상을 주세요.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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