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일본, 군함도 잊으면 사도광산은 없다
외교는 ‘51 대 49’의 미학이라고 한다. 외교적 협상에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 양보란 쉽지 않을뿐더러 이후에도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상은 진실이 뭐가 됐든 서로 “우리가 51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협상장을 떠나는 게 성공이다.
지난 2015년 나가사키(長崎)시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이뤄진 한·일 간 담판 뒤에 일본도 51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군함도의 ‘전체 역사’를 기록하라고 권고하면서 강제노역이 이뤄진 시기는 쏙 빼려 한 꼼수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등재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조건으로 일본은 최초로 “많은 한국인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 아래서 ‘강제로 노동한(forced to work)’ 사실이 있음을 인식한다”고 공개 시인해야 했다. 사실 엄청난 외교적 실패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를 그저 49에 불과하다고 묻어두고 싶었던 것 같다.
착각은 자유지만, 일본이 이번에 사도광산 등재를 시도하면서 똑같은 꼼수를 다시 쓴 걸 보면 정말 묻어버렸다고 자기 최면이라도 걸었나 싶다. 또 시기를 한정해 강제노역 사실을 누락하려다, 또 이코모스로부터 같은 권고를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죄질’은 더 나빠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제3자변제 해법 등을 결단하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신뢰를 쌓은 걸 역으로 이용하려는 분위기마저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일관계 개선에 전향적인 윤 정권이 출범하면서 (사도광산 등재에 반대하던) 한국 측 태도에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5월 11일 산케이신문 보도)는 식이다.
국내적으로 수세에 몰린 기시다 총리가 양보하기는 어렵다는 식의 논리도 띄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사정도 딱히 나을 건 없다. 동해에서 석유가 나온다는데도 지지율이 30% 초반에서 상승하지 못한다. 남의 사정 봐줄 처지가 못 된다. 굳이 지지율까지 안 가더라도 일본의 역사 왜곡 시도에 눈감으면, 남는 건 부질없는 브로맨스의 추억 한 조각밖에 없다는 점을 윤 대통령 자신도 모를 리 없다.
외교에서 ‘전례’의 힘은 강하다. 사도광산 등재 논의의 시작점은 군함도 때 확인한 “한국인이 강제로 노동한 사실”의 인정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심지어 일본은 피해자를 기리겠다는 군함도 등재 당시의 약속도 아직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한국민이 51이 아니라 ‘100 대 0’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겐 양보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유지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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