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인가 결혼인가? 잘 나가던 여기자가 선택한 것은

박은영 2024. 6. 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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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신문사를 배경으로 한 스쿠루볼 코미디 영화 <연인 프라이데이>

[박은영 기자]

언론 기자요? 그게 뭐 하는 거죠? 남들 뒷얘기 캐고, 소방차 뒤쫓고 인터뷰하자고 자는 사람 깨우고 애인 사진 훔치는 거요?
기자들 일은 다 알아요. 돈도 안 나오는데 죽어라 남의 일에 참견하죠.  
- <연인 프라이데이> 중

카메라는 신문사 <모닝 포스트>의 분주한 사무실을 천천히 비춘 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춘다. 문이 열렸다. 여주인공 힐디 존슨(로잘린드 러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그녀의 곁에는 약혼남 브루스가 있다.

힐디는 오늘 오후 4시 기차를 타고 약혼남의 고향 알바니로 떠난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내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힐디는 지긋지긋한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평범한 주부로 새 출발 하려 한다. 그녀는 브루스에게 "총알같이 다녀올게요"라고 인사한 뒤 성큼성큼 사장실로 향했다.

<모닝 포스트>의 사장 월터 번즈(캐리 그랜트)는 `기사 거리를 위해서라면 살인 말고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다. 사실 얼마 전까지 힐디와 월터는 부부였다. 그러나 일중독인 월터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힐디는 월터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그런데 이를 어째. 월터는 기자로서도 여자로서도 힐디에게 미련이 남았다. 그녀에게 날마다 전보를 보내고 수십 번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일 결혼을 하겠다고? "여자로만 대우받으며 살고 싶어요"라는 힐디의 말이 월터에게 통할 리 없다.

월터는 특종 취재에 도움을 주면 금전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힐디를 회유한다. 결혼식을 방해할 작정이다. 월터의 속내를 뻔히 알지만, 특종 거리라는 말에 힐디 안에 있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과연 힐디는 무사히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연인 프라이데이> 포스터
ⓒ 컬럼비아 픽처스
 
1940년 제작된 <연인 프라이데이>의 감독은 하워드 호크스(Howard Hawks 1896~1977)다. 호크스 감독은 국내에서는 <스카페이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모른 장르의 대가라는 칭송을 받으며 1975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다.

감독이 특히 재능을 발휘한 것은 스쿠루볼 코미디였다. 영어로 `스쿠루볼(screwball)`은 괴짜, 별난, 엉뚱한 등으로 쓰이는 속어다. 엉뚱하고 별난 사건을 연달아 터뜨리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코미디다. 밝고 경쾌하지만 사회적 모순과 문제를 비틀어 담아내기도 했다.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시기적으로는 미국이 대공황을 겪은 직후인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유행했다.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갈등`이다. 처음에는 갈등이 커지면서 주인공들의 관계가 위태로워진다. 하지만 결국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여주인공의 성격도 달라졌다. 1930년대 이전 영화 속 여주인공은 아름답지만 순종적인 캐릭터가 많았다. 일부러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인은 정숙해야 한다는 통념을 반영한 결과였다. 

스쿠루볼 코미디 속 여인들은 달랐다. 아름답지만 순종적이지 않았다. 타락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다. 그녀들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행동한다. 동시에 여성만의 재치와 감성을 발휘해 갈등을 해결해 냈다. 당시 남자들이 이런 여성상을 선호했다. 여성 관객들도 대리 만족을 느꼈다. 

<연인 프라이데이>의 힐디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녀는 신사들이 쓸 법한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행동과 말투도 어딘가 남성스럽다. 동시에 그녀는 남성들은 쓸 수 없는 기사를 써 낸다. 영화 속 남성 기자들이 그 기사를 훔치고 싶어 할 정도다.

힐디는 기자로서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과 여성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녀가 갈등하는 원인은 남자가 아니다.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기에 갈등할 뿐이다.
 
 두 주인공, 월터(캐리 그랜트)와 힐디(로잘린드 러셀)
ⓒ wikipedia
 
영화 촬영에 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째, 감독은 대사 속도가 가장 빠른 영화를 만들려 했다. 한 배우가 대사를 끝내기 전에 다른 배우가 말꼬리를 물고 말하기 시작한다. 당시 평균적인 미국인의 말 속도는 분당 140단어였다고 한다. 이 영화의 분당 단어 수는 240단어다. 덕분에 영화는 굉장히 시끄럽다.

감독은 영화의 배경이 언론사라는 이유로 이러한 대사 처리 방식을 택했다. <누가 악마를 만들었을까: 전설적인 영화 감독들과의 대화(1997)>를 쓴 피터 보그다노비치(Peter Bogdanovich)와 하워드 감독의 인터뷰에 이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 특히 빠르게 말하거나 논쟁하거나 무언가를 설명할 때 서로의 말을 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서로 겹칠 수 있도록 문장의 시작과 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대사를 썼다."

둘째, 감독은 배우들에게 애드리브(즉흥 연기)를 허용했다. 여주인공은 자신이 남주만큼 좋은 대사를 많이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감독 몰래 유령 작가를 고용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감독은 "오늘은 무슨 재주를 부릴 거야?"라고 인사했다. 유령 작가의 존재를 눈치챈 남주는 매일 아침 "오늘은 또 뭘 갖고 왔어?"라고 물었다.

즉흥 연기가 절정에 달한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 두 주인공과 약혼남 브루스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인물들은 쉴 새 없이 대화하느라 음식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9분 21초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촬영에만 꼬박 4일의 시간이 걸렸다. 
  
 레스토랑 장면에서 두 주인공의 즉흥 연기가 빛을 발한다.
ⓒ wikipedia
 
셋째, 영화의 제목은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이 영화의 원제는 <그의 소녀 프라이데이(His girl Friday)> 다. 시간 배경이 금요일인가? 여주의 이름이 프라이데인가? 둘 다 아니다. 이름의 출처는 1719년 발간된 영국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대표작 <로빈슨 쿠루소>다.

소설에는 주인공 로빈슨이 식인종으로부터 토인을 구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토인을 자신의 시종으로 삼고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붙인다. 토인과 만난 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의 원제 `금요일의 소녀`는 시종을 드는 소녀를 뜻한다.  

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영화에 공감할 것이다. 탁월한 능력이 있어도 결혼과 출산을 중심으로 한 가정을 고민하는 힐디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시대가 변해도 자아실현과 사회 진출을 향한 여성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최초로 여성 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1937~2022)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목소리를 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목소리를 냈으니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한 남자를 위한 사랑을 속삭이며 살 것인가? 유령 작가를 고용해서라도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 했던 여배우는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영화 속 힐디의 마지막 선택에 주목해 보자.

이런 분께 추천해요!

#흑백 영화 좋아하는 편 #기자들은 공감 백배 #좌충우돌 우당탕탕 시끌벅쩍한 영화에 강한 편

덧붙이는 글 | <연인 프라이데이>는 로튼 토마토 <최고의 영화 100선> 88위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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