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기 위해 교통 불편한 산골 마을로, 신기할 따름"
[이선필 기자]
▲ 무주산골영화제 초기 기획부터 현재까지 프로그램 전반을 꾸리고 있는 조지훈 부집행위원장 겸 프로그래머. |
ⓒ 무주산골영화제 |
올해로 12회째를 맞아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열렸던 무주산골영화제는 영화인들에게도, 일반인들에게도 그 특유의 따뜻함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주요영화제들보다 인지도나 규모는 작지만, 한번 무주를 찾은 관객은 절로 열혈팬이 되고 마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곳이다.
영화제 기간 중인 7일 오후 행사장 인근에서 조지훈 프로그래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회 때부터 주요 프로그램들을 기획 및 진행하는 살림꾼을 자처하고 있다.
지역성에 국한하지 않는 관객 친화 축제
올해 영화제는 지난해와 동일하게 4박 5일 일정으로 치러졌다. 총 21개국 96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매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실시하는 군소영화제 평가에서 대부분 1위를 차지해왔지만, 문화체육관광부를 위시한 영화제 지원 정책의 축소로 올해는 국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개막식과 일부 상영 행사를 줄이긴 했지만, 올해 또한 3만 5천여 명의 관객이 찾았다. "숙박시설과 상영관 거리가 멀고 교통도 불편한 이곳을 매년 찾아오시는 관객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라며 초기 영화제부터 현재까지 주요 분기점들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초기 때만 해도 군과 도 예산을 지원받는 만큼 지역 경제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제를 요구받기도 했다고 한다. 조지훈 프로그래머는 "솔직히 처음엔 이곳 무주에서 영화제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며 운을 뗐다.
"애초에 중심축은 영화를 좋아하는 외부 관객이었다. 기획 당시에 주민을 상상하며 하진 않았다. 젊은 관객이 찾지 않는 영화제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거든. 솔직하고 좀 과격한 표현으로 지금 수준의 예산을 가지고 주민을 위한 영화제를 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그냥 그 돈을 주민분들에게 나눠드리는 게 더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엔 개봉 영화를 주로 상영하다가 관객분들의 반응을 보며 토크와 배우 프로그램,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 살을 붙여나갔다.
▲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주요 풍경. 키즈스테이지에 마련된 서커스 등의 행사가 진행 중이다. |
ⓒ 무주산골영화제 |
여기에 일종의 힐링 콘셉트를 가미한 게 주효했다. 조지훈 프로그래머는 "당시 예능 프로 중 <힐링캠프>가 화제였는데 캠핑 문화에 치유를 덧대는 식으로, 지친 일상을 무주에서 위로받고 쉴 수 있는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이 영화제가 특이한 건 겉으론 말랑말랑해 보이지만 프로그램 면면은 꽤 단단하고 독특한 부분도 많다"고 강조했다.
덕유산 국립공원을 기반으로 한 산중 야외 상영, 그리고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무주등나무운동장과 주변 문화 시설을 활용한 실내 상영관의 조합은 무주산골영화제가 자랑하는 공간들이다. 밤 8시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덕유산국립공원 대집회장 야외상영은 쏟아지는 별빛과 함께 잔디밭에 눕거나 뒹굴며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실내 상영관과 주변 시설에선 각종 토킹 프로그램과 전시, 문화 공연이 이어진다. 등나무운동장에선 매일 저녁 7시부터 주요 뮤지션들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산너머로 노을이 질 때 어우러지는 선율에 많은 관객들이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좋은 시설의 극장이 없음에도 자연과 함께 영화와 공연을 보는 데에 일반 관객들의 만족감이 꽤 크다는 걸 영화제 기간 체감할 수 있었다.
"그간 전주 등 국제영화제 경험을 10년 정도 하다가 여기에 와서 느낀 건 태반의 관객들은 상영 퀄리티에 크게 예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네필(영화광)들에겐 무주의 상영관은 사실 열악할 수 있다. 근데 그분들보다는 영화 자체를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분들을 상상하면서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물론 아쉬운 점은 보완하고 부족한 건 채워야겠지만, 극장 시설이 없기에 여러 공간에서 영화를 트는 것이고 돈을 쏟아 붓기 보다는 주어진 조건에서 우선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주요 풍경. 영화 <딸에 대하여> 상영 후 배우 하윤경이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
ⓒ 무주산골영화제 |
코로나19 팬데믹의 교훈
2019년 터진 코로나19 팬데믹 직후로 무주산골영화제는 무료 상영 방침에서 유료로 전환했다. 관객 수가 급증하며 영화제에 와도 영화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고, 팬데믹 이후 현장에서 줄을 서는 문화가 급격히 사라진 이유도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유료 예매를 받기 시작하면서 영화제 입장에선 방문객 수를 예상할 수 있게 됐다는 장점도 있었다.
"나름 안전 문제도 사전에 예상해서 준비할 수 있게 됐다. 관객들 반응이나 필요를 좀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영화제가 영화만 보는 곳이 아니라 서로 생각을 나누고 대화의 장도 열려야 한다는 걸 코로나 팬데믹 때 배웠다. 그래서 사실 매년 몇 명이 오는지 숫자를 강조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얼마나 관객들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다시 오시게끔 하는 것이지.
재밌는 건 젊은 관객들이 교통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거 무주를 찾자 지역 주민들도 오히려 궁금해서 영화제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반찬만 잘 차려놓으면 밥을 맛있게 먹듯 제 역할은 프로그램을 맛있게 만들자는 데에 있다. 평소 무주에선 느낄 수 없는 활기가 영화제 기간에 생긴다. 넥스트엑터 전시(올해는 배우 고민시 전이 열렸다-기자 주)엔 배우 지망생들이 많이 찾고, 키즈스테이지엔 아이들과 함께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다. 이런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영화제를 하는 이유
국고 예산 지원이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영화제를 고민하고 이어가려는 건 단순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러 기고글을 비롯, 직접 창간한 다큐 매거진 등에 연재해 온 글에서 조지훈 프로그래머는 영화제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와 영화제 존재 의미를 끊임 없이 고민해왔다. 일각에서 종종 등장하는 국내에 영화제가 너무 많다는 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 고민의 최신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었다.
"영화제가 많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정해진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문제라면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하면 되는 것이다. 여러 영화제들이 저마다 뭔가를 해보려 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영화는 기본적으로 우리 삶과 그만큼 가깝다는 방증이다. 지금 같은 영화 산업 구조에선 영화제가 매우 중요하다. 일반인이든 시네필이든 영화를 놓고 여러 가지를 해볼 수 있거든.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소개되기 위해서라도 영화제는 그 영화들의 중요한 존립 근거가 된다.
▲ 무주산골영화제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인 야외공연 풍경. 등나무운동장에서 열린 카더가든 공연 직후 산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다. |
ⓒ 이선필 |
결국 관객이다. 조지훈 프로그램은 "이런 외지에 많은 사람들이 와주시는 걸 보면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라며 새삼 영화제 하는 이유를 되새김했다.
"사실 영화는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다. 도시에 극장이 얼마나 많나. 당장 TV만 틀어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무주까지 굳이 와서 영화와 공연을 즐겨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게 우리 일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힘은 관객이다. 어느 상영관에 들어가도 따뜻한 에너지가 있다는 걸 무주를 찾는 영화인들이 다 느끼고 돌아간다. 물리적 여건이 편리하진 않아도 이런 관객들이 계속 찾아주신다면 영화제는 충분히 이어갈 수 있다.
일개 프로그래머로서 하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영화를 선정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말이다. 제겐 좋은 영화를 뽑는 능력은 없다. 다만 다년간 쌓은 경험으로 우리 영화제에서 틀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임할 뿐이다. 긴 시간에 걸쳐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게 영화라면 영화제는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묶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무주산골영화제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 영화라는 게 얼마나 즐겁고 재밌는 것인지 함께 즐겨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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