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우선순위가 꼬여 버린 리시 수낙 영국 총리
[김명주 기자]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나는 매일 '중요한 일 세 가지'를 적어 본다. 수없이 많은 날들을 우선순위 없이 살다보니, 정작 해야 할 일을 잊거나 중요한 일을 놓친 경험이 많아서 생긴 버릇이다. 중요도를 생각하고 시작한 날은 우왕좌왕하는 시간이 줄고 일의 집중도가 높아져 훨씬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낼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월 6일은 대한민국 현충일이었다. 같은 날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에서는 디데이(D-Day) 8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2차 세계대전 중 서방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독일 나치(Nazi)를 물리치는 계기를 마련한 날을 기념한다. 당시 참전국이었던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미국, 캐나다의 국가 정상들이 자국 생존 참전 병사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군인 유가족들과 함께 참석했고, 현재 군 병력들이 80년 전 그 날의 연합작전 모습을 재연했다. 국영방송 BBC는 디데이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당시의 역사적 자료나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재는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 위협까지 하는 상황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상징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디데이 추모행사에서 미국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은 현재 푸틴(Vladimir Putin) 정권을 2차 대전 당시 나치 정부와 비교하며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임을 강조했다. '역사는 자유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지켜낸 가치'라고 역설하며 서방의 연합이 지금도 굳건함을 강조 또 강조했다.
나토(NATO)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젤렌스키(Zelensky) 대통령 내외도 디데이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서방 대표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 대통령 내외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장면, 젤렌스키 대통령과 노르망디 작전 생존 노 병사가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들이 화면에 반복적으로 나왔다.
▲ 영국 리시 수낙 총리 관련 기사 국가 수반 모임 대신 선거 관련 방송 인터뷰를 간 총리를 비난하는 언론 기사 |
ⓒ 김명주 |
디데이 행사 후 각국 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진행했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 프랑스의 엠마뉴엘 마크롱 대통령, 캐나다의 저스틴 트루도 총리와 함께 영국 수낙 총리를 예상했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외교부 장관이 대신 참석해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 중요한 정치 외교적 자리를 놔두고 영국 총리는 대체 어디로 간 건가? 지금까지 영국 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의 무기, 자금, 군사훈련 등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디데이 행사는 대외적으로 영국의 정치외교적 위치를 자랑해야 할 자리였다. 대신 수낙 총리는 선거 관련 한 방송사 인터뷰 촬영을 위해 자리를 비운 터였다. 이 인터뷰는 일주일 후에나 방영될, 말 그대로 급하지 않은 일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 수상의 카리스마를 기억하고 추모하던 국민들은 현 총리의 행동에 더욱 화가 났다. 영국 언론 매체들은 총리의 행동은 참전 전쟁 영웅들을 무시한 처사라고 맹비난을 했다. 심지어 같은 당의 당원들 마저도 수낙 총리 때문에 총선 지지율이 더 떨어지게 생겼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리시 수낙 총리는 바로 사과 인터뷰 방송을 내보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지난 6월 6일 아침, 리시 수낙 총리는 중요한 일 리스트 적는 일을 잊었던 듯하다. 총선을 한달 여 앞둔 지금, 집권여당도 수낙 총리 자신도 선거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 영국 2차 대전 참전 용사 묘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의 묘. 대부분 20대 초반의 어린 병사들이었다. |
ⓒ 김명주 |
영국 의회법엔 5년마다 총선을 치르도록 지정되어 있다. 다만 총리나 의회가 이유를 들어 예정보다 선거일을 앞당겨 공표할 수 있다. 지난 5월 22일, 리시 수낙 총리는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면서 관저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는 7월 4일 총선(General Election)을 선언했다.
여름 선거는 예상하지 못한 깜짝 발표였다. 같은 당원들마저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선거 준비 시간이 무척 짧아진 데다가 여름휴가시즌 직전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여름휴가만을 바라보며 한 해를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가철인 7월부터 9월 초까지 관공서도, 일반 사업장도 업무 처리가 거의 올스톱에 가깝다.
최근 발표된 2/4분기 인플레이션율은 3% 미만으로 코로나19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표가 좋을 때로 선거 날짜를 정했다는 가설이 우세하다. 또한 몇 주 전 치러진 지방 보궐선거 결과, 집권 여당이 기존 텃밭마저 상대당에 내어주는 등 결과가 참담하자, '조기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관심과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서'라는 지적도 있다.
집권당의 당수이자 총리인 리시 수낙은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선거 정책을 내놓았다. 고소득연봉자와 연금수급자의 소득 세금 감면, 영국 징병제 부활, 공공서비스 개선 계획 등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젊은 유권자의 표를 바라기보다는 정통 보수층의 표를 꽉 잡아 선거를 이겨 보겠다는 전략이다.
2010년 이후 정권을 이어온 토리당(Tories)의 성적표는 낙제점에 가깝다. 우선 영국 정치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 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입각한 관료 중 엘리트 교육 코스를 밟은 특정 학교 출신이 많다. 중앙 정부에 강력한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지역 간 빈부격차가 심화 됐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밖에도 국가보건시스템(NHS) 등 공공서비스의 질 저하, 사회기금 부족으로 인한 취약계층보호 축소, 브렉시트 이후 오히려 이민 정책 실패, 국경 경비 추가비용 증가로 일반 소비재 가격 상승, 재화 수급 불안정 등 서민 경제 상황이 눈에 띄게 악화됐다. 코로나 국가 락다운 시기, 보리스 총리를 비롯한 핵심 고위 공직자들이 연말 파티를 연 일탈 행동은 도덕적인 지탄을 받기까지 이르렀다.
국민들은 고단한 경제 상황에 지치고,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진력이 난다. 하지만 영국 정치 민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명한 전통 우파와 좌파 사이 간극이 보인다. 일을 잘하고 못 하고 보다는 상대방이 무조건 싫은 유권자 층이 두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다.
영국 총리 리시 수낙(Rishi Sunak)은 누구?
현 리시 수낙 총리는 경제통으로,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과 커리어를 쌓아왔다. 게다가 처가 쪽이 인도 재벌로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본인이 초특급 부자이다 보니 서민의 입장을 읽을 줄 모른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전 보리스 존슨 총리 시절, 리시 수낙은 경제부 장관으로서 정계 2인자로 자리 잡았다. 이후 리즈 트러스(Liz Truss) 전 총리와의 총리 경선에서 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러스 정권이 불안한 경제 상황 속에서 부자 감세 정책 강행을 발표, 국가 부도 위험 사태 직전까지 이르렀다. 경제통인 리시 수낙이 총리이자 구원투수로 등판하면서 지금까지 영국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 이후 실제 경제 지표들은 안정화 되어가고 있다.
정치 성향이 약하고 총리로서 카리스마 부족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인도계라는 인종적 특징도 전체 유권자들 대상으로 봤을 때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번 일은 수낙 총리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한' 한계점을 만천하에 알린 격이 되었다. 기존 관료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어 리더로써의 자질을 의심 받게 됐다. 뿐만 아니라 큰 결정을 할 때 총리 주위에 올바른 정치적 조언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유권자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안 그래도 어려운 선거판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다보니 집권여당으로서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하게 됐다. 벌써 이번 선거 실패를 감안하고 대놓고 수낙 총리의 실수를 비판하는 당내 차세대 주자 정치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권자들은 정치 잡음으로 피곤하다. 하지만 선거철 민심을 잡으려는 후보자들간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다음 주에는 또 어떤 복안을 들고 나올지 흥미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누가 다음 5년 동안 자신과 지역을 대표할 수 있을지 바쁘게 고민해야 하는 영국민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사이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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