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7) 중공군 피해 부산으로 피란… 해군 통신병으로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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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주일 예배를 마치신 아버님과 형님이 조금 뒤 도착하셨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너무 놀라 한참 야단을 치시고 오촌 집에 형님을 보내 페니실린을 받아오게 했다.
1951년 중공군 참전으로 1·4 후퇴 당시 노량진에서 화물차를 타야 했는데 한강 다리가 이미 폭파된 상황이라 몰려든 피란민들이 한강 가에서 아슬아슬한 임시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몇 주 후 부산에서 김정손군을 만나 함께 해군에 가기로 하고 해군 통신병 시험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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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밥 먹으며 나흘 만에 부산 도착
친구 김정손과 함께 해군 입대 약속
집에 돌아오니 주일 예배를 마치신 아버님과 형님이 조금 뒤 도착하셨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너무 놀라 한참 야단을 치시고 오촌 집에 형님을 보내 페니실린을 받아오게 했다. 마침 오촌 집에 페니실린이 딱 한 병 있었다. 그것을 등의 상처에 바르고 몇 주일이 지나 반창고를 뗄 수 있었다. 폭격 당시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편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등에 파편 두 개가 박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등의 파편은 이후 내 삶에서 번번이 출현했다. 한번은 무슨 일로 병원에서 MRI 검사를 하려는데 검사대에 누우니 그 파편이 감응해 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검사를 더 진행할 수 없었다. 외국 여행을 갈 때도 공항에서 가끔 문제가 된다.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 척추와 너무 가까워 위험해 뽑아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파편이 어찌 척추나 머리에 박히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을 겪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느끼게 된다.
1951년 중공군 참전으로 1·4 후퇴 당시 노량진에서 화물차를 타야 했는데 한강 다리가 이미 폭파된 상황이라 몰려든 피란민들이 한강 가에서 아슬아슬한 임시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1월 추위가 살을 베는 듯했다. 수많은 피란민이 몰려와 노량진역에 세워둔 화물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달구지를 끌고 천신만고 끝에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탔다. 그 높은 화물차 위로 작은 수레를 끌어 올리느라 무척 힘들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이불 보따리와 짐을 쌓아 4일 밤낮을 지내며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화물칸 위에서, 1월의 추위에 노출된 채 이불을 덮고 나흘간 눈 내리는 겨울을 보냈다. 싸갔던 밥이 꽁꽁 얼어 찬물을 부어 부수어 몇 숟가락 먹을 수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화물칸 차 위에서 얼음 밥을 먹고 이불을 덮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자고, 정거장에 서면 모두 변소로 향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그 아슬아슬한 화물차 지붕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부산진역에서 내려 오촌의 집이 마침 부산진 방직공장 옆에 있어서 거기로 갔다. 몇 주 후 부산에서 김정손군을 만나 함께 해군에 가기로 하고 해군 통신병 시험에 합격했다. 1월 22일 부산항에서 해군 함정에 올라타 기념으로 몽둥이로 세 대 맞고는 퉁퉁 부은 채 진해로 가서 해군 신병 20기로 120명과 함께 입대했다. 신병 교육을 마친 후 해군 통신학교로 갔다.
해군에서는 한국 민중신학의 거물이자 세계 YMCA 이사장을 지내고 이화여대 교수로 정년퇴직한 서광선군을 만났다. 그리고 그 해군 통신병 생활을 김정손 서광선 현천호와 함께 보냈다. 현천호는 후에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해군 소장까지 진급했다. 김정손군은 제대 후 김교신의 제자인 서울농대 유달영 교수의 딸과 결혼했다. 수원의 한 예식장에서 김교신의 동료였던 함석헌이 주례를 맡아 결혼식을 올렸는데 신랑 신부에게 의자를 주어 앉힌 채 1시간 이상의 주례사를 한 기억이 난다. 김정손은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천우사에 입사해 미국에 파견됐다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매우 미남이었고 정의감이 두터운 사나이였다. 서광선과는 일생 막역한 친구로 지냈다. 그는 2022년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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