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내 속마음이 극락이다
초여름엔 산속 바위에 앉아 좌선하는 맛이 일품이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3일 참선 수행’을 하기 위해 찾아온 참가자들과 선원 뒤편 산마루에 올랐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널따란 바위 봉우리에 둘러앉았다. 앞이 탁 트여 올망졸망 늘어선 선원의 당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되지빠귀, 팔색조, 휘파람새들의 청아한 노랫소리 싱그럽다. 귓불을 스치는 청량한 산바람이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스님은 선원에서 어느 곳이 제일 좋아요?” 누군가의 물음에 “여기지요”라고 즉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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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단지 물질로 보는 시대
구분하고 차별하는 껍질에 갇혀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믿음 필요
」
지난해 여름엔 수행하러 온 도반들과 오랜 세월 바위에 켜켜이 쌓였던 낙엽을 치웠다. 이틀 동안 열다섯 명이 함께 모여 울력을 마치니 넓고 멋들어진 ‘바위 좌선대’가 생겼다. “스님은 어떻게 이 산꼭대기에 이런 바위가 있는 줄 아셨어요?”, “보석을 찾아내는 혜안이 있으신가 봐요.” 연신 감탄사를 자아내는 참가자들의 반응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 후로부터 적어도 하루 한 번씩은 좌선대에 오른다. 걷기 수행 삼아 오르기도 하고, 손님이 오면 자랑삼아 오르기도 한다. 숲의 향기와 고요를 담고 느끼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다.
수행자는 외적 고요함을 경계하고 내적 고요함을 찾아야 한다고 옛 선사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가 뛰어난 사리불이라는 수행자가 있다. 그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 좌선하기를 즐겼다. 하루는 유마 거사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사리불이여,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숲속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좌선합니다.”
“사리불이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좌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선정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입니다.”
유마 거사의 말에 사리불이 크게 부끄러워하고 반성하였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혹여 나도 고요한 장소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다. 본심으로 살면 모든 곳이 극락임을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되뇌지는 않았는지를.
마음공부 지침서 『선요』(禪要)를 쓴 고봉 스님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수행에 관해 물으면 “빛나는 태양이 허공에 떠 있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이 이 빛을 가리는가?”라고 물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본마음은 평화롭고, 자유롭고,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갖가지 나쁜 감정들과 차별하고 욕심을 부리는 마음, 고집을 피우는 마음은 왜 생기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밝고 고요한 참 마음을 믿지 못하고, 다만 과학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단지 물질로 보고, 과학적 실험으로 밝혀진 것만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짙어가는 중이다. 과학이 종교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주는 위험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어리석음도 심각해지고 있다.
어리석음은 필연적으로 많은 한계를 만들어 낸다. ‘나’라는 틀을 형성하게 되고 재산, 지위, 직업, 나라, 인종으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껍질을 만들고, 스스로 한계를 두 겹, 세 겹 만든다. 그러다가 답답한 지경에 이르면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주저앉는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년 시절이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의 기대감이 내 작은 어깨를 짓눌렀다. 조그마한 집도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 틀을 깨야겠다는 마음이 단단해질 즈음 나는 출가를 단행했다.
출가해 절에 들어가면 1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한다. 출가하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없어지고 성씨에 행자님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오 행자, 장 행자, 김 행자’ 등으로 불리며 성씨만 남는다. 정식으로 스님이 되면 성씨마저 없어지고 새로운 이름, 법명을 받는다. 그 순간 ‘나’라는 굴레가 사라지면서 개인적인 꿈이나 부모님의 기대감은 사라지고, 나를 짓누르던 한계들도 어느 순간 극복이 된다.
22살에 출가한 고봉 스님은 ‘태어날 때 어디서 오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밥 먹고 잠자는 것을 잊은 채 좌선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스님이 들려준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 하는 소리에 더 막막해졌는데, 어느 날 ‘백년, 삼만육천일을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는 글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이런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 갖는 것이지만 살기 바쁘다 보니 나를 돌아볼 틈이 없어 지나치고 만다.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안개가 걷히면 푸른 산이 나타나듯이 모든 순간 ‘나는 도대체 누구지?’라는 의문을 품으면 내 마음의 문제들이 걷히고 차츰 본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본심이 내 마음의 극락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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