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행복했다”… 히어로 된 음악감독

황지영 2024. 6. 1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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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은 JTBC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판타지 로맨스에 몰입감과 설득력을 부여하는 음악들을 만들어 호평을 얻었다. [사진 안테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된 작업이었는데, 이상하게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요.”

지난달 말 서울 논현동의 안테나 사옥에서 만난 뮤지션 정재형(54)은 지난 9일 종영한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음악 작업을 이같이 요약했다. 1995년 그룹 베이시스로 데뷔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내 눈물 모아’ ‘지붕 위의 고양이’ ‘순정마초’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베테랑임에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란다.

정재형이 드라마 음악감독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연출자인 조현탁 PD의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 단계부터 합류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업에 공을 들였다.

그의 첫 드라마 음악에 대한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클래식하면서도 몽환적 느낌이 나는 음악이 현대인의 고질병에 걸린 초능력자 가족의 애틋한 판타지 서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주연 배우 천우희도 “노래가 매회 기다려진다”며 응원을 보냈다.

그는 “그간 여러 가지 일들을 해봤지만 드라마 음악감독 일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동시에 가장 행복한 작업이었다”면서 작업기를 풀어놓았다.

Q :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웠나.
A : “일단 양이 방대했다. 드라마 음악은 보통 팀 단위로 진행하는데, 나는 혼자 하느라 두세 번 고꾸라졌다. 어시스턴트를 두긴 했지만, 작곡은 전부 내 몫이었다. 막바지엔 힘이 빠져 말까지 잃었다. 2박 3일 가사를 쓴다는 핑계로 도망간 적도 있다. 스스로 재촉하는 성격 탓에 스트레스가 컸다. 촬영 전 50여 곡의 배경음악(BGM)을 만들었다.”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사기꾼 도다해(천우희·왼쪽)와 시간여행자 복귀주(장기용). [사진 JTBC]

극 중 BGM은 초능력 가족이 지닌 각각의 특성(예지몽, 시간여행, 비행, 독심술)에 따라 달리 흐른다. 정재형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20세기에 태어나 전자음악을 한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이디어에 착안해 클래식과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합쳤다.

초능력 가족에 대적하는 사기꾼 가족의 등장 음악은 재즈풍의 사운드로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살렸다. OST에는 2년 6개월 만에 돌아온 이소라를 비롯해 JTBC ‘싱어게인3’의 소수빈, ‘뮤지션들의 뮤지션’ 이승열 등이 참여했다.

Q : 조 PD의 어떤 설득에 넘어갔나.
A : “지난해 2월 배우 캐스팅을 확정하기 전에 내게 시놉시스를 건넸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Q : 음악이 대중적이거나 친근하지는 않다.
A : “판타지 요소에 맞춰 내가 생각한 드뷔시를 표현했다. 시청자들이 썩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이라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을 보상받는 느낌이다.”

Q : 가수 이소라와의 작업은 어땠나.
A : “이소라 6집 앨범 ‘눈썹달’(2004) 이후 20년 만의 작업이었다. ‘바라 봄’이란 노래를 보내줬더니, ‘이거, 나 아니면 누가 하니?’라는 답변이 왔다. 내가 쓴 가사가 있었는데, 이소라가 본인 입에 붙도록 고쳐보겠다고 하더니 더 멋지게 노랫말을 써왔다. 장면을 꿰뚫어 본 것처럼 이야기를 잘 표현해서 놀랐다.”

Q : 소수빈의 보컬이 여전히 달콤했다.
A : “노래 실력이 기대 이상이었다. ‘너와 걷는 계절’은 남녀 주인공의 불안정한 관계를 표현한 노래라서 음역이 굉장히 넓다. 소수빈의 음색이 저음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섭외했는데 고음까지도 잘하더라.”

Q : 초능력마다 다른 BGM은 어떻게 만들었나.
A : “예지몽을 꾸는 복만흠(고두심)은 수면 음악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복귀주(장기용)는 레트로 사운드로 표현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비행 능력을 지닌 복동희(수현) 음악이었다. 마블 영화 등에서 익숙한 능력이기에 드라마만의 특징을 잡아야 했다. 동희가 행복하게 날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리고, 상쾌하고 기분 좋은 팝 분위기로 틀을 잡았다.”

Q : 또 드라마 음악 작업 제안이 오면 수락할 건가.
A : “조 PD가 다음 작품도 같이 하자고 하길래 단박에 거절했다. 지금은 푹 쉬고 싶다. 1년 넘게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조 PD가 제안한 다음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내심 궁금하다. 이 고통을 다 잊을 때쯤 할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음악은 영화 음악과 달리 매회 즉각적인 반응이 오니까 신기하면서 행복했다.”

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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