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대기업 노조, 정년연장에 승진거부권도 요구
# 대리급인 8년 차 직장인 최모(33)씨는 내년에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진 연공이 쌓일수록 임금이 높아지는 호봉제를 적용받았지만, 과장부터는 성과에 따른 연봉제로 전환된다. 더는 노동조합(노조) 조합원으로도 활동할 수 없다. 승진한다는 기쁨보다 걱정이 앞선다는 최씨는 “100세 시대에 가능한 한 오래 직장 생활을 하고 싶은데 보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라며 “과장 이상부터는 천천히 승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고액 연봉·승진을 욕망하기보다 정년까지 ‘가늘고 길게’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본격화된 임금·단체협상(임단협)에선 정년연장과 함께 ‘승진거부권’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라올 정도다.
노동계 “승진 거부할 권리 달라”
노조 관계자는 “비조합원으로 전환되면서 각종 혜택을 포기해야 하는 점과 임금체계가 변경돼 경쟁이 과열되는 것에 대해 조합원들이 부담을 느끼는 점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조합원 입장에선 고용 안정을 위한 안전장치로, 노조 입장에선 줄어드는 조합원 숫자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되도록 '길게' 회사에 남아있으려는 욕구도 커지고 있다. 현대차·기아 노조는 만60세 정년을 64세로 HD현대그룹 조선 3사 노조와 삼성그룹 노조연대, LG유플러스 제2노조는 60→65세로 늘려줄 것으로 요구했다.
이는 젊은 층에선 워라밸을 통한 개인 행복을 선호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고, 은퇴가 머지않은 중·장년층은 되도록 오래 회사에 남아있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것이란 풀이다.
실제 ‘승진 코스’로 통하는 기획부·인사부 등 본사 핵심 부서 근무가 과거 직장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최근 2030 직장인들 사이에선 선호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한 4대그룹 인사담당 임원은 "아직 대세(大勢)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젊은 직원 중심으로 이런 성향이 늘고 있다"며 "'회사에 헌신해 인정받겠다'는 기성세대와 달리 MZ세대에게는 '내 삶이 더 중요하다'는 가치관이 강하다"고 전했다.
지난해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직장인 111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54.8%가 '임원 승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워서'(43.6%)라는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고 '임원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20.0%), '임원은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13.3%)가 뒤를 이었다.
“국민연금 개시 연령에 맞춰 정년 연장해야”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은퇴 후 생계유지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지난해 12월 한국고용정보원 고용동향브리프의 ‘고령 인구의 경제활동과 노후 준비’ 보고서에 따르면 65~79살 고령자 55.7%가 ‘계속 일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2013년 응답률 43.6%보다 12.1%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계속 일하고 싶다고 답한 응답자의 절반 이상(52.2%)는 '생활비'를 이유로 꼽았다.
이에 노동계에선 법정정년 연장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은 2013년 법정정년을 60세로 연장한 이후 약 10년간 변동이 없는 상태다. 국민연금 수령 개시 연령이 현재 63세에서 2028년 64세, 2033년엔 65세로 늘어나게 된 것과 비교하면 퇴직 후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 크레바스(소득 공백 기간)’ 기간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최근 발간한 '제22대 국회 입법정책 가이드북'에서 “저출산 고령화 심화에 따른 노동 공급 부족 및 연금 재정 악화, 미래세대의 부담 등을 고려해 정년연장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년연장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입법조사처는 “정년연장 외에도 '계속고용' 및 '재고용' 등의 형태도 가능하게 해 기업에 유연한 방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직무급 임금체계와 임금피크제 도입 시행 적극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회사가 총대를 메고 정년을 연장하겠다고 나서는 건 무리다. 사회적으로 연장 방식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고 정책적으로 뒷받침이 됐을 때 단계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세종=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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