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아닙니다만’ 음악 만든 정재형…"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된 작업이었는데, 이상하게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요.”
지난 달 말 서울 논현동의 안테나 사옥에서 만난 뮤지션 정재형(54)은 지난 9일 종영한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음악 작업을 이같이 요약했다. 1995년 그룹 베이시스로 데뷔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내 눈물 모아’, ‘지붕 위의 고양이’, ‘순정마초’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베테랑임에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음악에 대한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클래식하면서도 몽환적 느낌이 나는 음악이 현대인의 고질병에 걸린 초능력자 가족의 애틋한 판타지 서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시청자들은 “노래가 드라마 전개에 120%를 기여했다”,“신선하고 신비로운 음악이 마법처럼 드라마를 완성시켰다”는 댓글을 달았고, 주연 배우 천우희는 “노래가 매회 기다려진다”는 응원을 보냈다.
‘중독’,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두근두근 내 인생’ 등 영화음악 작업을 해왔던 정재형이 드라마 음악감독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연출자인 조현탁 PD의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 단계부터 합류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업에 공을 들였다.
그는 유튜브 채널 ‘요정재형’의 예능 ‘요정식탁’을 통해 게스트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토크쇼를 진행 중이다. 고현정, 엄정화, 조승우, 주지훈 등 톱스타들이 다녀간 화제의 채널이다. 정재형은 ‘요정식탁’이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음악작업에 간접적 도움이 됐다고 했다.
"토크 예능이 제게 세상과 소통하며 일하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원래 사람 없는 외지에서 두문불출 음악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음악 작업과 예능을 동시에 하면서 예민한 성격이 순화됐고 일에 대한 개념도 이해했습니다."
그는 "그간 여러 가지 일들을 해봤지만 드라마 음악감독 일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동시에 가장 행복한 작업이었다"면서 작업기를 풀어놓았다.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웠나.
“일단 양이 방대했다. 드라마 음악은 보통 팀 단위로 진행하는데, 나는 혼자서 하느라 두세 번 고꾸라졌다. 어시스턴트를 두긴 했지만, 작곡은 전부 내 몫이었다. 막바지엔 힘이 빠져 말까지 잃었다.”
조 PD의 어떤 설득에 넘어갔나.
"작년 2월 배우 캐스팅을 확정하기 전에 내게 시놉시스를 건넸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조 PD는 내 음악을 꿰고 있었고 예능 ‘요정식탁’까지 보고 온 터라, 음악 이야기를 주고받을 건 없었다. 드라마 음악의 어법은 잘 몰라 부담된다고 하니 걱정 말라더라. 배려 덕에 오랜 기간 작업할 수 있었고, 스케줄대로 진행됐다."
대답을 들어보면 쉽게 끝난 작업 같은데.
“2박 3일 가사를 쓴다는 핑계로 도망간 적도 있다. 스스로 재촉하는 성격 탓에 스트레스가 컸다. 결국은 촬영 전 50여 곡의 배경음악(BGM)을 만들어둘 수 있었고, OST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서너 곡 작사도 했다.”
극 중 BGM은 초능력 가족이 지닌 각각의 특성(예지몽, 시간여행, 비행, 독심술)에 따라 달리 흐른다. 정재형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20세기에 태어나 전자음악을 한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이디어에 착안해 클래식과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합쳤다.
초능력 가족에 대적하는 사기꾼 가족의 등장 음악은 재즈풍의 사운드로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살렸다. 주인공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OST에는 2년 6개월 만에 돌아온 이소라를 비롯해 JTBC ‘싱어게인3’의 소수빈, ‘뮤지션들의 뮤지션’ 이승열 등이 참여했다.
음악이 대중적이거나 친근하지는 않다.
“판타지 요소에 맞춰 내가 생각한 드뷔시를 표현했다. 제작진은 물론 시청자들도 어렵게 느끼거나, 썩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이라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을 보상받는 느낌이다.”
가수 이소라와의 작업은 어땠나.
“이소라 6집 앨범 ‘눈썹달’(2004) 이후 20년 만의 작업이었다. '바라 봄'이란 노래를 보내줬더니, ‘이거, 나 아니면 누가 하니?’ 라는 답변이 왔다. 내가 쓴 가사가 있었는데, 이소라가 본인 입에 붙도록 고쳐보겠다고 하더니 더 멋지게 노랫말을 써왔다. 장면을 꿰뚫어 본 것처럼 이야기를 잘 표현해서 놀랐다.”
소수빈의 보컬이 여전히 달콤했다.
“노래 실력이 기대 이상이었다. ‘너와 걷는 계절’은 남녀 주인공의 불안정한 관계를 표현한 노래라서 음역이 굉장히 넓다. 소수빈의 음색이 저음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섭외했는데 고음까지도 잘하더라.”
초능력마다 다른 BGM은 어떻게 만들었나.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캐릭터 간 관계가 첨예한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 신경을 썼다. 예지몽을 꾸는 복만흠(고두심)은 수면 음악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복귀주(장기용)는 레트로 사운드로 표현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비행 능력을 지닌 복동희(수현) 음악이었다. ‘슈퍼맨’, 마블 영화 등에서 익숙한 능력이기에 드라마 만의 특징을 잡아야 했다. 동희가 행복하게 날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리고, 상쾌하고 기분 좋은 팝 분위기로 틀을 잡았다.”
‘요정식탁’에 출연 배우들을 부른다면.
“천우희, 장기용을 불러 조 PD에 대한 뒷담화를 늘어놓겠다. 조 PD가 섬세하고 집요한 스타일이라 나 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힘들게 했을 거다.(웃음)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성격이다. '이 집요한 양반이 마지막까지 한 곡을 더 쓰게 하고, 내 노래를 기다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했다.”
또 드라마 음악 작업 제안이 오면 수락할 건가.
“조 PD가 다음 작품도 같이 하자고 하길래 단박에 거절했다. 지금은 푹 쉬고 싶다. 1년 넘게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조 PD가 제안한 다음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내심 궁금하다. 이 고통을 다 잊을 때쯤 할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음악은 영화 음악과 달리 매회 즉각적인 반응이 오니까 신기하면서 행복했다.”
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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