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켓 경기에 뉴욕이 처음으로 들썩이다
[장소영 기자]
빌딩 외벽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Jumbotron)을 집중해서 보고 있던 몇 사람이 갑자기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크리켓 경기 중계였다. 그 앞을 지나던 행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전광판을 올려다 보았다. 미국이 이겼다는 소식에 표정이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크게 반색하지는 않았다. 가던 길을 다시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 사이로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아시아계 청년이 눈에 띄었다. 그와 함께 나란히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혹시 파키스탄이 고향이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크리켓?" 한 마디를 건네니 파키스탄의 패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양손을 펴 보였다.
▲ 아이젠하워파크에 내걸린 크리켓 월드컵 홍보물 미국민에게 크리켓은 낯선 종목이다. 그러나 미국팀의 예상외의 선전에 8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자 점점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롱아일랜드 아이젠하워파크에 신축된 크리켓 스테디움은 대회가 끝난 후 철거될 예정이다. |
ⓒ 장소영 |
사실 미국인들에게 크리켓은 낯선 스포츠이다. 뉴욕시 일대만 해도 NFL(프로 풋볼)과 MLB(프로 야구)에 관심이 몰려있고, 곧 US OPEN 테니스 대회도 열린다. 특히 6월은 아이스하키(NHL)와 프로농구(NHL)의 결승 경기가 있어 크리켓 월드컵은 시선을 끌지 못했었다.
맨해튼 근외 지역인 롱아일랜드 아이젠하워파크에 3만4천 석 규모의 크리켓 경기장이 신축 중이라는 보도에도 여론은 회의적이었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 팬층도 그다지 두껍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티켓 판매를 시작하고 본격적인 홍보에 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호응이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코카 콜라 같은) 대기업의 후원과 대중에게 쉽게 접근해 갔던 미디어 전략, 무엇보다 미 동북부에 크리켓에 익숙한 남아시아계 인구 증가를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뉴욕에 거주하는 인도계 미국인만 해도 70만을 넘었으며(2019년) 이는 미국 다른 도시의 인도계 인구의 3배가 넘는다.
크리켓은 알려진대로 영국 연방국가에서 인기가 높다. 영국 외에 인도와 파키스탄, 스리랑카, 호주 등이 크리켓 강국으로 꼽힌다. 특히 인도는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한다. 인도계를 중심으로 남아시아계 미국민의 크리켓 경기 시청률이 꾸준히 성장세에 있었고, 이번 월드컵 대회의 티켓 판매에도 한몫을 했다는 평이다.
▲ 쇼핑몰에 걸린 크리켓 팬 환영 설치물 T20 크리켓 월드컵 A조 예선 경기가 열리는 아이젠하워파크는 교통성이 좋고, 주변에 대형 주차공간과 쇼핑몰이 여러개 있어 편의성도 높다. 예상외의 높은 관심과 하루 수천명의 방문객이 이용하며 크리켓 특수를 누리는 중이다. |
ⓒ 오윤우 |
T20이라 불리는 크리켓 월드컵(ICC T20 WORLD CUP)은 20개국이 네 개의 조로 나뉘어 예선을 치른다. 뉴욕에서는 세계 랭킹 1위 인도와 경쟁국 파키스탄,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가 속한 A조의 경기가 진행 중이다.
크리켓 팬들은 볼 것도 없이 인도와 파키스탄이 A조 1-2위로 8강에 진출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세계 랭킹 18위 미국팀이 예상외로 선전하며 조 1위로 올라섰다가, 9일(일) 인도가 파키스탄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며 조 1위를 탈환하자 남아있는 미국-인도의 경기(12일 수요일)에 팬들은 물론 미국인들의 관심도 커졌다. 파키스탄은 미국에 이어 숙적 인도에도 패하며 충격 탈락했다.
끝나지 않는 테러와의 전쟁
T20 월드컵이 열리기 전 홍보에서는, 일부 시간에 한정해 공원과 주변 도로의 차량 통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도 되었다. 또 연습 경기장이 일정 시간 공개된다고 알려져 인기 선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팬들의 기대도 높았다.
▲ 보안 경비가 강화된 대회장과 연습장 주변 팬들의 기대와 달리 엄격한 경찰 통제가 있고, 대회장과 연습장이 있는 공원이 전면 폐쇄되었다. 대회 직전 ISIS의 선전 영상물을 발견하고 뉴욕 주와 나소카운티, 뉴욕 주 경찰의 경비를 강화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
ⓒ 장소영 |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차량 전면 통제와 함께 두 공원이 폐쇄된 이유가 있다. 테러 예보 때문이다.
CNN과 NBC 등의 주요 언론에 따르면, T20 경기가 열리는 아이젠하워파크의 스테디움을 ISIS가 지목하며 모종의 공격적 행위를 부추기는 일종의 선전 영상을 게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난 5월 29일 뉴욕 주지사가 성명을 통해 뉴욕주 대테러부대와 뉴욕주 경찰대와 협력하여 안전 조치를 강화한다고 발표했고, 나소 카운티 행정관 역시 차량 통제에 따른 주민 협조를 부탁했다. 등록된 언론사의 촬영 장비외 드론은 일체 띄울 수 없다.
크리켓은 미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월드컵 대회와 발맞추어 체육 시간에 크리켓 경기 체험을 해보는 학교들이 다수 있었다. 고등학생인 제노비아 양은 집에서 가족들과만 시청하던 크리켓을 학교에서 친구들과 하게 될 줄 몰랐다며 기쁘다고 했다. 처음 크리켓을 접했다는 고등학생 S군은 야구와 달리 자기 위켓(투수가 공으로 맞춰야 하는 세 개의 막대)만 지켜내면 횟수에 제한 받지 않고 계속 배트를 휘두르며 한 사람이 큰 점수를 낼 수 있어서 매력적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지역 언론은 크리켓 경기를 보는 법과 함께, 모여서 함께 응원할 수 있는 홀이 있는 레스토랑과 전광판이 있는 실내 쇼핑몰을 매일같이 소개하는 중이다.
미국과 인도의 경기가 있는 12일(수)에는 아이젠하워파크의 경기장 뿐 아니라 인근 공원에 전광판을 설치해 야외 응원이 가능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한다. 세계 크리켓 강국을 맞아 선전하고 있는 미국팀은 8강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다. 미국팀의 승리는 연일 경기장 3만 4천석 전석 매진 뿐 아니라 티켓 가격을 크게 올려놓았고, 미국민의 눈을 붙드는데도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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