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낳은 '아이', 친구들은 그를 '거지'라고 부른다
[김상목 기자]
2024년의 학교현장은 (부정적인 의미로) 펄펄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일종의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데, 이해당사자 모두가 불만족스러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과도한 교권침해가 학생인권조례 탓이라며 폐지하고, 반대쪽에서는 청소년들이 마치 학교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중이다. 핵가족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과 기능 중 상당 부분을 학교에서 담당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정작 학교에선 교육 기능 외에 지나치게 과도한 분량을 떠안아 본래 맡아야 할 교육 기능조차 수행하기 어렵다며 비명을 지른다.
학교는 마치 아이들의 최종해결방법처럼 인식되곤 한다. 이제 학교는 맞벌이 부모를 대신해 탁아와 보육을 담당하고 (돌봄) 끼니를 해결해주며 (급식) 과도해진 사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업이 끝나고도 멈추지 않는다. (방과후교실) 교육의 범위는 확장되어 다양한 분야를 소화해야 하며 행정업무는 산처럼 쌓여간다. 아이들을 보호하고 시설 또한 관리해야 한다. 작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업무가 추가되면서 학교현장은 수십 개가 넘는 직종이 신설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학교 비정규직/교육공무직)으로 채워졌다. 정규직 vs 비정규직, 교사 vs 비(非)교사, 학교 vs 교육청, 학교 vs 학부모, 교사 vs 아이, 아이 vs 아이, 갈등의 구도는 복잡함을 넘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방불케 한다. 그야말로 현재 한국사회의 압축된 판이라 봐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다양한 개선책이 강구되는 중에도 해결방법은 요원해 보인다. 이는 학교현장의 문제가 고스란히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이 시궁창이고 사회가 무너지는데 학교 내부만 평화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디스토피아 영화들, <폭력교실>이나 <배틀로얄> 지경은 아니다. 그 정도라면 이미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한참 지난 상황일 테다. 하지만 현재 학교란 공간에서 일어나는 눈살 찌푸려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은, 마치 '잠수함 토끼'처럼 예언적임을 사회 구성원 누구나 우려하기 때문일 테다. 그런 고민을 품은 이들에게 영화 <양치기>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관객을 충격과 번민으로 휘감고도 남을 문제작이다.
▲ "양치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마노엔터테인먼트 |
수현'은 곧 동료와 결혼을 앞둔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다. 신참 티는 이제 벗어난 그는 아이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데다 휴일엔 보육원에서 자원봉사도 하는 나무랄 데 없는 '선생님'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담임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남학생들은 이제 막 성장 중이라 육체적으로 제압하기도 힘들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일일이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학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내 아이가 우선이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의적으로 판단하기 일쑤다. 그래도 교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아이들을 잘 대하려 노력한다.
수현의 반에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요한'이란 남자애가 있다. 가난한 가정환경이 티가 나는 요한을 급우 중 일부는 '거지'라며 놀리곤 한다. 사건이 일어나면 아이들은 요한을 범인으로 단정해버린다. 다툼이 끊이지 않지만, 요한을 편들어주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아이와 달리 어찌 보면 조숙해 보이기도, 어떨 때는 형형한 눈빛이 섬뜩해 보이기도 한다. 듣자 하니 예전부터 문제를 종종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수현은 아이들을 편견 없이 대하려 노력한다. 비가 오던 날, 수현은 우산 없이 집에 가야 할 상황인 요한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민다. 요한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을 베푸는 수현에게 뭔가 갈구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학교 일정에 쫓기는 수현은 함께 우산을 쓰고 가자는 요한에게 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며 내보낸다.
그런데 다음날 귀가해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던 수현 뒤에서 요한이 우산을 들고 나타난다. 자신을 몰래 따라온 게 분명하다. 학생을 사생활 공간으로 들이는 게 내키진 않지만, 일단 수현은 요한을 집에 들인다. 배가 고프다며 먹을 걸 청해 게걸스레 먹던 요한은 수현의 정돈된 집 안을 살펴보며 집착을 보인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약속이 잡혔던 수현은 가기 싫다며 떼를 쓰는 요한을 내보낸다. 그 과정에서 수현은 요한의 팔에 있던 상처를 확인한다. 가정폭력의 흔적이 농후한데도 수현은 일정에 쫓긴 나머지 요한을 내보내기 위해 조바심을 낸다. 그런데 다음날 수현이 요한에게 물리적 폭력을 저질렀다는 신고가 도착한다.
그렇게 수현과 요한의 악연이 시작된다. 수현은 졸지에 문제교사로 낙인찍힌다. 요한의 엄마는 아이가 폭행당했다며 합의금을 요구한다. 학교에선 누구도 수현의 편에 서길 주저하며 방관할 따름이다. 수현은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대체 요한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고 확인도 불가능하다. 요한이 그 이후로 집을 나가 행방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성격의 수현은 졸지에 폭력교사 취급을 받자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엄마와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악화 일로다. 수현은 점점 벼랑으로 몰리면서 편집증과 공황 증세에 시달린다. 한편 요한은 여기저기 쏘다니며 계속 일을 키우지만, 정작 소년의 속내는 통 알 길이 없다.
▲ "양치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마노엔터테인먼트 |
교사 수현과 학생 요한의 어그러진 관계가 <양치기>의 핵심 갈등 축이지만, 두 사람의 캐릭터는 선명한 선악 구도와는 까마득히 거리가 멀다. 둘은 개별적으로 자신들이 속한 공간에서 약자 포지션이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영화 내내 수시로 역전되며 긴장을 증폭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그래서 관객이 둘 중 한 명에게 감정을 이입하려다가도 망설여지기 일쑤다. 수현이 제자의 거짓말 때문에 제대로 봉변을 당하고 주위에서 다들 몸을 사리며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을 보며 교사의 편을 들려다가도, 그렇다면 '빌런' 역할을 떠맡게 된 요한이 처한 불우한 가정환경과 함께 아이가 직면한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목격하면 자연스럽게 학생에게 동정심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 동적 균형을 수시로 '막대 구부리기'를 통해 조율해가며 사건의 전개와 미스터리의 규명을 향해 한발짝씩 전진한다.
수현은 요한에게는 '교사'이자 '어른'으로 우위에 선 존재다. 하지만 학교 내에선 이제 갓 신입을 벗어난 여교사로 교감에겐 위계에서 눌리고, 가정적으로는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와 같은 교사인데도 한부모 가정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기에 이것저것 신경이 쓰이는 처지다. 게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남학생들에게 성인인 교사인 동시에 이성적인 대상화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남성보다 물리력을 포함해 이것저것 취약한 처지인 '여성', 직장에선 위계서열로 연차가 낮은 '평교사'에 불과하다. 게다가 학생과 학부모에게 공격당하면 진상이 어떻건 간에 일단 책이 잡히는 처지다. 무슨 일만 터지면 자기방어에 급급해도 모자란 신세다. 하지만 그런 수현이라도 '어른'이자 '교사'이니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에겐 절대적 존재에 가깝다.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아이의 현재와 장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수현의 판단과 행동이 얼마나 크게 작용할 수 있는지는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요한은 그런 질서에 균열을 가져오는 존재다. 통상적으로 요한이란 존재는 둘 중 하나로 그려지게 마련이다. 경제적으로 불우하고 부모가 역할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가정 내에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지어 학대에 노출되는 캐릭터는 가련한 희생자 & 환경 탓으로 타락한 문제아 중 하나로 정형화되는 법이다. 소년의 주변 환경은 아주 전형적인 조건에 가깝다. 어린 나이에 원치 않던 아이를 낳은 엄마는 자녀를 부양하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일을 전전해 왔을 테고, 그 과정에서 망가졌을 테다.
보호받고 싶어 계속 남자에게 의지하지만 변변찮은 상대만 만나다 보니 오히려 사태가 악화만 된다. 그런 속에서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않으니 아이를 챙길 리 없다. 그는 주위의 나쁜 어른들에게서 살아남고자 하는 일념으로 '슬픈 괴물'이 되는 과정에 서 있다. 동정을 충분히 살 만한 상황에서 요한은 자기 능력껏 저항도 하고 구조도 요청해 봤지만 무엇 하나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울분이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렇기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도 온전히 그에게 쥐어진 권능이다. 그렇게 요한과 수현의 관계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소용돌이친다.
세상의 모순을 제대로 조명하려는 영화적 시도는 결코 뻔한 캐릭터와 선악 구도를 설정하지 않는다. 선한 역할이라도 뭐든 만사형통으로 술술 흘러갈 리 없고, 악한 역할에 머물러도 그저 원래 악당이니 저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몰락할 것이라 단언하기 어려워야 집중력을 관객이 유지할 수 있고 이야기가 흥미로워지는 법이다. <양치기> 속에는 악역이나 반동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 명백히 드러나지만, 관객이 개별 인물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각자 나름대로 행동의 개연성과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천성이 사악하거나, 절대 악의 화신 같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대신에 누구는 그저 보신주의에 치우치고, 누구는 현실을 바꿀 의지력이 모자라며, 공통으로 '내 일'이 아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선 안쓰러워도 방관하려는 태도를 선보인다. 수현과 요한 주변 인물 대다수는 조금만 신경을 쓰고 힘을 모으면 영화 속 파국을 일정 단계에서 저지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자기 일처럼 팔 벌려 돕지 않는다. 각자의 사정을 대며 합리화할 뿐이다. 두 주인공 각자의 비극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쳐진다.
▲ "양치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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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타인들의 무관심과 배제는 또 관점에 따라 합리화될 구석이 존재한다. 그런 조명이 <양치기>의 탁월한 성취라 하겠다.
① 수현의 남자친구는 모함에 처해 곤란한 여자친구에게 정말 필요한 기댈 구석을 해주기는커녕, 교사로서의 평판이나 결혼식 성사 여부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인다. 수현에겐 진실과 소통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 또한 중요한 결정은 자의적으로 내리곤 한다. 물론 그가 이기적이거나 수현에게 무관심하진 않다. 그저 적당히 타산적이고, 장래를 기약한 상대의 어두운 면을 끌어안기에는 각오가 부족한 것뿐이다.
② 수현의 엄마는 딸을 염려하고 아끼지만, 본인 역시 남편(수현의 생물학적 아빠)에게 시달리다 결별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다. 그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 딸을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 역시 요한의 엄마처럼 자녀를 양육하느라 본인의 삶이 어그러졌다는 무의식적 감정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③ 수현이 근무하는 학교의 교감과 동료 교사 그룹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좋은 동료로 보였지만, 문제가 터지자마자 그를 의심하거나 혹은 제대로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교감은 보신주의에 빠진 데다, 교장 승진을 앞두고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수현이 책임을 지는 선에서 봉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수현의 상황을 악화시키기에 한 몫 톡톡히 한다. 동료 교사들 역시 몸을 사리며 연루되지 않으려는 기본자세를 견지하며 자신과 동급이던 수현이 점점 추락하자 그를 소외시켜 불똥을 피하려고만 할 뿐이다.
④ '진수'를 포함한 수현의 반 학생들은 초반에는 요한을 괴롭히거나 이를 방관할 뿐 아니라, 사건 이후 수현을 공격하는 데에도 그저 '재미' 삼아 가담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정작 일이 커지면 부모 뒤로 숨어버리는 행태를 내보이곤 한다. '촉법소년' 논란처럼 자신들이 저지르는 게 어떤 파장을 낳을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일이 커지면 피할 수 있다는 조건을 악용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어도' 넘어간다. 학교 내 구성원 다수가 방관자로서 타인의 불행을 재미 삼아 거론하며 말이 옮겨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며 사태가 악화된다.
⑤ 요한의 엄마 & 사실혼 관계의 동거남은 그들 또한 사회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게 쉽게 유추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현재 상태와 요한에게 가하는 정서적/육체적 학대가 정당화될 순 없는 노릇이다. 요한의 엄마는 학대의 주범이라기보다는 방조에 가깝고, 물리적 폭력의 주동자인 동거남은 경제적 능력이 취약해 얹혀살며 겪는 울분을 무력한 아이에게 쏟아낸다. 그들 각자의 처지는 동정할 구석이 조금 있을지 몰라도 자신보다 약자에게 배설하는 행위는 영화 속 사태 악화의 결정적 동력이다.
⑥ 요한 가족이 셋방살이하는 집주인 할머니는 누구보다 요한의 상황을 잘 아는 '어른'이지만, 상황 개선을 위한 어떤 의지나 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가 잠을 설칠 만큼 시끄럽거나 밀린 월세를 독촉할 때만 2층에 드나들며 역정을 낼 뿐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모든 진실을 다 내려다보거나 혹은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상징적인 장면들에 등장하지만, 정작 그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은 그저 상황을 은폐하거나 봉합하기 위함이다. 이 캐릭터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이웃' 혹은 '동네'의 은유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아이'를 낳는 사회의 딜레마를 보여주다
영화는 영리하게 개별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변주하며 거대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한국 사회의 초상을 음울한 색조의 풍경화처럼 묘사한다. 비록 영화의 마무리가 '열린 결말'이자 미래는 하기 나름이라는 주제를 풀어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해 평소에도 염려하던 이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과 고민을 던질 게 분명하다.
<양치기>를 보자마자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자, 국내에도 개봉했던 고(故) 로랑 캉테 감독의 영화 <클래스>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저소득층과 이민자 가정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중학교 교실을 배경 삼은 영화는, 겉보기엔 시끌벅적한 학교 내에서 열혈 교사와 다양한 배경의 개성 가득한 아이들이 벌이는 소동극일 것이란 기대를 짓밟아 뭉개버린다. 이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교사와 학생들이 벌이는 작은 전쟁과 돌발적 비극은 우리가 흔히 선망하며 이상화하곤 하던 서구 선진국 교육현장이 적지 않은 노력과 개혁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교육 불가능의 시대'로 치닫는 건 아닌지 불안에 빠지도록 만들고 말았다.
<클래스>를 보며 충격에 휩싸인 다음 10여 년이 지났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 학교현장은 그보다 더하면 더한 상황으로 보일 지경이 되었다. <클래스>가 무수히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아이와 부모들 때문에 불가항력 상황에 가깝다면, <양치기>(와 교육현장 문제를 다룬 무수한 한국독립영화 작업) 속 한국의 학교 풍경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차별과 배제를 확대 재생산하며 억지로 서열과 계급을 설정 놀음하듯 찍어내는, 함께 자멸의 길로 추락하는 지옥도처럼 여겨질 정도다.
결국 <양치기> 속 초등학교의 세계는 우리 사회 현주소의 압축판 자체다. 과거를 굳이 비교한다면, 부모가 될 준비도, 억지로 부여된 책임감일지언정 감당하려는 결의도 부재한 이들이 아직 '아이'인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었다. '어른-아이'들은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감당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들은 사회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학교가 자신들의 몫을 나눠 받아 해결해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길은 대학입시로 통하는' 고장이 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의지도 여력도 없는 사회는 이를 학교로 다 전가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로 오늘날 학교현장은 실제로는 입시교육을 최우선으로 설정함에도 명목상으론 기존에 가족 공동체가 알아서 소화하던 기능 과반을 무한 책임지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상상되는 중이다. 당연히 탈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도 학부모도 간과한 게 있다. 사회적 차원의 직무유기와 부모들의 책임회피는 학교현장 구성원들도 별반 차이 없게 짊어진 문제라는 점이다. 자신들과 같은 세대가 교사가 되었다. 이들은 과거처럼 폭력과 권위로만 찍어누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른들이 저지른 차별과 배제, 성적 지상주의와 부에 따른 계급 구분을 극복할 재량이나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현처럼 아이들에게 공감하고 세밀하게 돌보려는 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오히려 교감이나 동료 교사들처럼 적당히 할 일만 하고 문제 생길 일 안 만드는 관료적 행태가 현명한 자기관리로 여겨진다. 교사가 그러면 되느냐며 혀를 끌끌 찰 수 있겠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 직장은 물론 사회 일반에서 선보이는 행태 그대로에 불과하다. '아전인수'도 적당히 해야할 노릇이다.
▲ "양치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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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는 학교 현장의 혼돈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마치 옛날 오락실 두더지 잡기 게임기처럼 여기저기 분출하는 시스템 붕괴의 징후 어디에도 접목 가능한 이야기를 다룬다. 학교에선 교사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군대는 기합이 빠졌다며 단순하게 '의지 드립'을 여전히 운운하는 중이다. 직장에선 MZ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애정이 없다며 개탄한다. 공무원이 시민에게 서비스 정신이 없다며 한탄하는 것 역시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권위적으로 억누르거나 은폐되지 않고 투명하게 공개되는 빈도가 높아졌기에 더 두드러져 보인다는 '진실'을 우리는 흔히 외면하고 만다. 그리고 각자의 권리가 민주화와 함께 중시되지만, 더불어 조율하고 배려하는 시민의식은 공동체 의식의 쇠퇴와 함께 완성되지 못한 상태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겉으로 내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권력과 재력 추구를 지상과제로 돌아가는 것이 결정적 원인일 테다.
<양치기>는 그런 부정적 면모를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배경으로 미니어처 모형처럼 압축한 풍경화에 가깝다. 그 그림 속에서 수현과 요한은 상황에 따라 적대와 갈등의 축이 되기도,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연대의 관계로도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는 능동적 존재들이다(영화의 제목이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양치기"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 그들의 관계 변화는 유독 이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극단적 인물 표정 클로즈업을 통해 효과적으로 상징화된다. 수현 역을 맡은 배우 손수현과 요한 역을 맡은 배우 오한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가 주목하며 영화를 따라간다면 한 차원 다른 몰입에 빠져들 테다. 수현이 한없이 예민하기에 때로는 공황으로, 때로는 연민으로 한없이 파고드는 심경이 저릿하게 전해지고, 한결의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이해할 수 없기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가도 곧이어 바닥이 없는 슬픔을 함축한 처연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선과 응시를 조금 더 강조하자면, 겉으로는 서로 눈빛을 마주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럴 의지가 없는 이들의 공허한 시선 vs 정말로 공감해줄 상대를 찾고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내 편이 되어줄 이를 갈망하는 이들의 절박한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 또렷하게 구별되기 시작할 테다. 수현과 요한의 너무 팽팽해서 끊어질 것 같이 불길한 시선 교차 가운데 이들의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해주는 존재의 응시를 꼭 발견하시길 기대한다.
수현은 그 응시하는 시선에 절망도 하고 회복도 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요한과 끊어졌던 접속 역시 같은 시선에 의해 복원된다. 결국에는 어떤 일이건 해결하려면 일단 마주 보고 말하는 데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수현과 요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새로운 출발점에는 서게 된 것 역시 그런 경로를 어렵지만 밟았기 때문이니까. 당연한 과정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보기 힘든 구석이 종종 튀어나와 불편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직시'해야만 하는 도전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품정보>
양치기 A Good Boy
2024│한국│관망 비극 심리 스릴러
2024.06.12. 개봉│94분│15세 관람가
감독 손경원
주연 손수현(수현 역), 오한결(요한 역)
출연 금해나(지숙 역), 김윤배(종호 역), 조경창(영우 역), 남미정(춘자 역),
김학선(명준 역), 손예원(지혜 역), 김금순(은숙 역), 송정빈(진수 역),
안채흠(은지 역) 외
제작 방과후 필름 / 영화사 손가락
제작지원 영화진흥위원회 / 부산영상위원회
제공/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2023 남도영화제 시즌1 순천 관객상-경연: 장편
2022 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2023 10회 춘천영화제 인디 시네마
2023 25회 부산독립영화제 MADE IN BUSA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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