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원래 밖을 향하게 마련입니다, 치매 환자도요
[이진순 기자]
반신마비인 하나 씨는 앉고 서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제 몸을 씻겨주려 합니다.
기미에 씨는 자신이 먹다 흘린 음식을 제게 먹여주려 합니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배회하던 요시오 씨는 따라다니는 제게 "자네는 어디를 가고 싶은 겐가?"라며 걱정해줍니다.....
어르신들의 세계에는 '나'의 느낌이 흘러넘칩니다. '나'의 주관끼리 서로 부딪칩니다. 그곳에는 구령에 맞춰 '우향우'를 하지 못하는 '나'가 잔뜩 있습니다.
저자가 표현하는 '요리아이'의 풍경이다. 요리아이는 일본 후쿠오카의 노인요양시설이다.
<돌봄, 동기화, 자유>라는 책 제목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예전에 읽었던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노인홈 '요리아이'의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해 눈길이 갔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선 홀딱 반해버렸다(관련 기사: 요양원 거부하는 노인들을 위한 남다른 요양시설 https://omn.kr/28c6c ).
요리아이의 하루하루에는 그 어떤 거대하고 훌륭한 말에서도 느끼기 힘든 삶의 핵심이 빛을 발했다. 책을 읽다가 빙그레 웃고 같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떨 땐 가슴이 뻑적지근해지기도 했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책과 함께 했다.
이 느낌을 나누고 싶었다. 절실하게. 그런데, 요약하기가 힘들었다. 책 곳곳에서 전해지는 감동을 나누자니 책 한 권을 그대로 옮겨쓰게 될 듯했다. 그래서 어렵게 몇몇 순간만을 골라본다.
▲ 책표지(다다서재) |
ⓒ 다다서재 |
한 할머니가 갑자기 먹기를 거부하셨다. 저자는 이에 대해 올바른 것도 그릇된 것도 아니었다고, 그걸 받아들인다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요리아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먹을까' 혹은 '먹지 않을까' 하는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짓고 할머니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손을 대지 않으면 수저로 입가에 가만히 가져가 보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따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남편이 말이야. 나 보고 '미쳤어, 미쳤어.'하는 거야. 너무 분해. 나도 받아치고 싶어. 나는 미치지 않았어. 노망난 거지"라고 화를 내는 할머니가 계시다. 그녀는 점심을 먹으면 항상 남편을 떠올리고, 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왜 걷는지는 바로 잊어버리지만, 지칠 때까지 계속 걸으신다. 저자는 할머니와 함께 걷기를 반복하다가 마을의 여러 곳에 들러 할머니를 지켜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부탁은 다른 개인주택 주민들로까지 확대된다.
부탁을 받은 이웃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돌봄의 문제를 털어놓는 분들도 있었다. 그간 막연하게 느껴졌던 동네에 구체적인 얼굴이 생긴 듯했다. 목적을 잊어버린 걷기가 계속되면서, 마을의 점으로 존재하던 주민들이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가버리는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안전' 장치를 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식'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자유와 안전의 문제에서 최악의 사태를 아예 없애려는 노력이 아니라 최악의 사태를 품어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 지난 4월초, 벚꽃놀이가 열려 어우러진 요리아이 입소자들의 모습. 사진출처: 공식홈페이지(http://yoriainomori.com) |
가족과 상의한 후 튜브를 삽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근거를 논리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10년 넘게 서로의 몸을 동기화해왔단다. 이 책 제목 <돌봄, 동기화, 자유>의 일부이기도 한 '동기화'란, 마치 한 몸처럼 현재의 느낌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이후 5년 동안 할머니는 입으로 먹으면서 살아가셨다. 입으로 먹지 못했던 기간은 임종이 가까워진 며칠 동안만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처음 만졌을 때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생리적인 혐오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원한 적 없던 상황에 놓여진 두 사람이 온갖 감정의 파고들을 헤쳐나가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밤새 사람을 깨우는 할머니 때문에 한잠도 자지 못한 직원에게 저자는 묻는다.
"아이고, 여덟 번 넘게 일어나셨다니 큰일이었겠네. 그래서 몇 번째 일어나셨을 때 할머니를 때리고 싶었어?"
"그러게요. 여섯 번째 정도였을까요."
"그렇군. 나 같았으면 네 번째에 때리고 싶었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장면에서는 저자의 사람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사랑' '배려' '선의' 등 비판하기 어려운 말에 기초해 돌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 이념과 윤리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살아있는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돌봄에 대한 아름답고 예쁜 말들을 들으면서, 때로는 거친 말보다도 더 소화가 잘 안 되는 체기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책을 읽으며, 그 체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같은, 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부분이기도 한 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해야만 한다는 강압을 그 아름다움과 예쁨에서 느꼈던 것 같다.
'모든 생명은 먹히고 배설됩니다. 그 과정 속에 나는 살아 있습니다. 먹고 배설하는 것만으로 존재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돌봄은 그 과정을 마지막까지 돕는 일입니다.'
마치는 글에서 저자는 이같이 말한다.
존엄한 삶을 이야기하며, '먹고 싸기만 하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종종 접했던 것 같다. 우리 삶에서 가치, 의미, 존엄과 같이 품격있는 것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아직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위 글을 읽으며 나는 무언가로부터 구원받는 느낌을 받았다.
성경이나 경전 등 종교서가 아니어도, 원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구원했던 이 책이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구원의 손을 내밀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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