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매 경기 결승전처럼 임할 것”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주장 신은주(31)의 시합 전 플레이리스트에는 반년 넘게 한 곡이 고정돼있다. 유명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제가였던 ‘우리의 꿈’이다. 이루기 어려운 꿈을 좇아 동료들과 바다를 항해하는 주인공처럼, 신은주 역시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선수들과 함께 달려가는 중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번 파리올림픽에선 ‘한국 유일 구기 종목’이라는 무거운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벌써 어깨가 무겁지만, 현실적으론 메달은 고사하고 1승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계랭킹 22위 한국은 노르웨이(2위), 덴마크(3위), 스웨덴(4위), 독일(6위), 슬로베니아(11위) 등 유럽 강호들과 함께 ‘죽음의 조’에 속해있다.
이번에는 큰 폭으로 세대교체까지 진행해 변수가 더 많아지기도 했다. 2004년 ‘우생순’ 신화를 써낸 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 여자 핸드볼은 2008 베이징 대회 동메달 이후 16년간 올림픽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해볼 만한 경기는 솔직히 없다”면서도 “매 경기 결승전이라 생각하고 임하겠다”는 신은주를 지난달 29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만났다.
“‘언니 저희 할 수 있을까요?’ 애들이 많이 물어봐요. ‘이제 여자 핸드볼 끝났다’는 말들도 나오고 다들 너무 ‘안 된다, 안된다’ 하니까.”
부쩍 늘어난 관심만큼 선수들의 부담감이 커진 지금, 주장이 짊어진 무게는 배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료들을 북돋고 팀에 활력을 주는 데에 신은주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최선을 다하자”, “후회 없이 하자”는 뻔한 말도 그의 입을 거치면 힘이 더해진다. 올해로 주장 경력만 7년 차인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인 24살에 처음 소속팀에서 주장 완장을 찬 뒤, 줄곧 리더를 맡아왔다.
“처음엔 주장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너무 힘든 거예요. 학교 운동부에선 다 같이 철이 없어도 됐는데, 실업팀은 달랐어요. 고참 언니들이 말하길, 주장으로서의 위엄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 말을 듣다 보니 오히려 후배들이랑 가까워지는 데 오래 걸렸던 거 같아요. 이젠 반대로 아무렇지 않게 장난도 칠 수 있는 편한 리더가 되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신은주는 ‘이끌지 않으면서 이끄는’ 리더십을 지향한다. 세부적인 사항까지는 간섭하지 않되, 각자 맡은 역할만 제대로 짚어주는 것이다. 단체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 선수들의 개인 시간만큼은 존중하기 위해서다.
신은주는 “먼저 존중을 하니까 존중이 돌아오는 것 같다”며 “코트 안에서도 각자 자기 역할이 있다는 걸 인식시켜주면 후배들도 빨리 알아듣고 이행한다”고 말했다.
신은주는 주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코트 안에서도 팀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신은주가 맡은 레프트윙 포지션은 팀의 주득점원은 아니지만 연계플레이에 능해야 한다. 사이드라인 부근에서 민첩하게 움직여 속공 득점 기회를 노리면서도 수비에 가담하곤 한다. 더 좋은 공격 전개가 가능해지도록 전체적인 팀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이다. 신은주는 “분위기만 조성해줄 뿐, 플레이를 이끌지는 못하는 자리”라며 웃어 보였다.
팀을 살피는 가운데 자신만의 무기도 벼려야 한다. 신은주는 이번 올림픽을 위해서 스핀슛을 연습하고 있다. 스핀슛은 점프 후 슛을 던질 때 순간적으로 손목을 비틀어서 공에 회전을 주는 기술이다. 일반적인 슛에 페이크 동작이 추가된 것으로 골키퍼를 교란하는 데 효과적이다. 신은주는 “올림픽에선 쟁쟁한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스핀슛을 넣어보는 게 개인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이제는 베테랑 반열에 들었지만, 사실 신은주는 ‘늦깎이 국가대표’다. 여느 선수들처럼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지 않고 실업팀에 있다가 2016년에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대표팀에 승선하고 나서도 ‘백업의 백업’인 ‘세 번째 선수’로 오래 지냈다. 신은주는 “동일 포지션에서 2명 정도가 승선하는 게 보통인데 제가 늘 세 번째였다”며 “다행히 시합을 많이 따라다니는 편이긴 했지만 메인 선수로 뛸 수는 없어 조급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고 돌아봤다.
그 불안정한 시기를 신은주는 온전히 연습으로 버텼다. 다행히 참고할 만한 가이드라인은 있었다. 신은주는 “어렸을 때는 선배들을 보며 모방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지금도 꾸준히 연습하고 있는 스핀슛 역시 기교에 능한 언니들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배운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 제 것으로 흡수하고 나면 반대로 차별화 포인트를 연구하면서 선수로서 색깔을 찾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오른발이 주발이었던 신은주는 양발잡이가 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레프트윙 포지션은 주로 골대 정면이 아닌 대각 방향에서 공격을 하기 때문에 오른발로 점프를 할 경우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았다. 10년 넘게 몸에 익은 습관을 바꾸는 데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신은주는 대표팀에서 오래 경쟁하려면 주발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고 돌아봤다. 오른발로 점프를 해도 높이가 충분했고, 슛 성공률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전 무대에서의 경험이 변화를 이끌었다. 왼발 점프가 몸에 익기 시작하고 처음 나선 2018년 아시아선수권 카자흐스탄전에서 말 그대로 ‘인생 경기’를 펼쳤다. 신은주는 “숨이 꼴딱꼴딱 차는데도 계속 속공이 터지면서 득점에 성공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며 “대표팀 소속으로 처음 MVP도 받아봤고, 같이 뛴 동료들도 지금까지 가끔 언급할 정도”라고 말했다.
올림픽에선 후배들의 인생 경기를 만들어주려 한다. 신은주는 “일단 첫 경기만 이기면 나머지는 따라온다고 생각한다”며 “확실히 지금 선수단이 분위기가 오르면 전염 속도가 빠르다. 어린 선수들이어도 자신감을 얻으면 무섭다”고 말했다. 첫 경기 상대인 독일과는 2019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무승부로 끝났던 경기가 마지막 기억이라 더 자신감이 있기도 하다.
올림픽을 마치고도 대표팀에서 풀어야 할 숙제는 많다. 가장 먼저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만나 패배했던 일본에 다시 설욕해야 한다. 당시 대표팀은 경기 내내 단 한 번도 리드를 잡지 못하고 10점 차로 완패했다. 일본과의 경기는 항상 전반전에 뒤지다 후반전에 역전하는 양상이었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신은주는 “뭐에 씐 듯 들어갈 골도 들어가지 않았다”며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끼리 ‘고생했다’는 말도 못 할 정도였다. 후배들에겐 시작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해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아픈 기억을 돌이켰다. 이어 “2년 후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선 일본에 배로 갚아주고 싶다”며 “아직 먼 경기지만 선수들이 다들 이를 갈고 있다”고 전했다.
진천=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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