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유죄'에도 조용한 바이든…'비호감 대결'의 딜레마 [김필규의 아하, 아메리카]

김필규 2024. 6. 1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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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이달 초 미국의 진보 성향 시민단체 '무브온(MoveOn.org)'은 부랴부랴 5만장의 스티커를 제작해 배포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얼굴 위에 '중범죄자(Felon)'이라는 글자를 얹은 스티커다.

지난달 30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성추문 입막음을 위해 거액을 지급하고 회사 장부를 조작한 혐의에 대해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유죄 평결을 받았단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추진한 이벤트다. 홈페이지에선 누구든 주소만 기재하면 해당 스티커를 무료로 보내주겠다고 적었다.
무브온 측은 "마침내 트럼프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면서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진보 시민단체 '무브온'이 무료 배포하고 있는 '트럼프는 중범죄자' 스티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유죄평결이 나오자 제작에 들어갔다. MoveOn.org

트럼프에 반대하는 전직 공화당 전략가들의 모임 '링컨 프로젝트' 역시 이 기세를 몰아 트럼프를 더 몰아붙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죄 평결이 나온 당일부터 "트럼프, 당신은 범죄자"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뿌리고 있다. "이참에 트럼프의 이마에 '중범죄자'라는 문신을 새겨야 한다"는 게 제프 티머 링컨 프로젝트 수석 고문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 달리, 정작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캠프는 너무 차분한 모습이다. 뉴욕에서 재판이 진행된 지난 몇 주간, 트럼프의 재판 결과가 이번 선거 판도를 바꿀 것이란 전망도 나왔지만, 바이든 캠프에선 그러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동 전쟁 휴전안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죄 평결을 받은 다음날이었지만 이와 관련해선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사법체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정도의 메시지에 그쳤다. 로이터=연합뉴스

실제 한 캠프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재판 이후에도 특별히 선거 전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 전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앞으로 트럼프가 겪을 고통은 굳이 우리가 프레임을 만들지 않아도 언론 등을 통해 유기적으로 일어날 것"이란 이야기였다.

심지어 바이든 캠프 내에선 앞으로 트럼프를 두고 "범죄자"라는 용어를 쓸지 말지를 놓고도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평결 나흘만인 지난 3일 코네티컷 그리니치의 연설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라고 처음 표현했지만, 그나마도 비공개로 진행된 모금행사에서였다.


"트럼프 유죄라고 바이든 입지 강화 힘들어"


상대 후보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선거 공학적으로 봤을 때 더 없는 호재다. 그런데도 바이든 캠프가 로키(Low-key) 전략으로 가는 것은 이번 미국 대선이 기록적인 '비호감 대결'이기 때문이다.

CNN은 트럼프가 유죄라고 해서 바이든의 불안한 대중적 입지가 강화될 가능성은 작다고 분석했다. 공화당원이든 무당층이든, 트럼프를 찍겠다고 결심한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트럼프를 정말 좋아해서가 아니라 바이든이 더 싫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에게 어떤 악재가 있다 해도 그 표가 바이든에게 흘러들어오긴 힘들다.

이런 정황은 여론조사 숫자로도 드러난다. 최근 마퀘트대 로스쿨 여론조사(지난달 6~15일, 미 유권자 1033명)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패했다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도 이들 중 3분의 1은 '그래도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답했다. 그런 모순된 결정을 내리게 된 주된 배경은 '바이든의 대통령 직무수행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90%)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유죄 평결을 두고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게 바이든 캠프의 계산이다. 되려 트럼프 지지층만 결집하고, 중도층의 마음도 떠나게 할 수 있다.
레이 라 라자 에머스트대 교수(정치학)는 "바이든 대통령뿐 아니라 민주당에게도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자신들의 브랜드가 아니다"라며 "상대를 비아냥거리는 것은 오히려 트럼프 캠프가 자신의 지지층을 동원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봤다.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는 공생 관계"


트럼프 캠프도 고민은 마찬가지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투표하겠다는 민주당원·무당층 가운데 상당수는 바이든이 정말 좋다기보다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정한 이들이다. 따라서 바이든이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고유명사를 틀리는 등 특검 보고서의 표현대로 '기억력 나쁜 노인'의 모습을 자꾸 보인다 해도, 바이든에 실망한 표가 트럼프에게 가기는 힘든 구조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약점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의 고령 논란, 실패한 물가 정책은 트럼프가 중범죄자라는 사실을 가려주고, 반대로 바이든의 실정은 그가 트럼프라는 악당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용서가 되는 모습이다. 여느 선거였다면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서로 가려주며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일종의 공생관계인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유죄 평결을 받은 뒤 "수치스러운 재판"이라며 "진짜 판결은 11월 대선에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AP=연합뉴스

그러다 보니 이번 유죄 평결을 두고 바이든 캠프와 트럼프 캠프에서 나온 메시지도 결국 같은 결론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평결 직후 법원의 기자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재판"이라며 "진짜 판결은 11월 대선에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소셜미디어에 "트럼프를 몰아낼 방법은 투표뿐"이라며 진짜 승부는 대선임을 강조했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에 대한 유죄 평결이 초유의 사태인 것은 맞지만, 이번 대선의 승부처로 삼기는 힘들다는 판단이다. 공격을 통해 상대방의 표를 빼앗는 전략보다는 지지층을 결집하는 계기로 삼는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워낙 호감도가 낮은 후보들 간의 대결이 펼쳐지면서 새로운 기록이 나올 가능성도 커졌다. 공화당의 선거 전략가 휘트에어스는 "누가 당선돼도 어느 때보다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보다 높은 채로 당선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워싱턴=김필규 특파원 phil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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