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천사 강림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1819~77)는 천사를 그려 달라는 주문에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내 눈앞에 천사를 데려다 놓으면 그려 주겠다”고 응수했다. 이런 말이 무색하게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지하 전시실에는 천사상이 한가득하다. 조각가 신미경(57) 개인전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이다. 신작 100여점을 내놓았는데, 포를리·바사리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천사 이미지를 조각으로 제작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강신재(1924~2001)가 1960년 『사상계』에 발표한
「젊은 느티나무」
의 첫 문장이다. 비누 냄새는 주인공의 인상이나 관계 등을 시각적·촉각적으로 환기한다. 천사 조각상들은 전시장 밖까지 강한 존재감을 발한다. 향기, 바로 비누향 때문이다.
서울과 런던에서 활동하는 신미경은 지난해 우연히 ‘엔젤향’을 접하면서 천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보이기는커녕 그 존재 여부마저 불확실한 천사를 가지고 향기까지 만들어 내다니 상상력의 끝판왕이 아닌가 했죠.” ‘엔젤’ ‘스노우 엔젤’ ‘엔젤스 윙’ 등 시판 3종 천사향을 담은 비누로 천사 조각상을 만들었다. 비누향의 하이라이트는 화장실. 어린이갤러리가 있는 지하 화장실 세면대에 놓인 천사 조각상을 만져보고 씻어볼 수 있다. 적당히 관람객 손을 탄 뒤 다시 전시할 예정이다.
런던 유학 중 대영박물관에서 본 매끈한 옛 대리석 조각이 비누처럼 보인 게 시작이었다. 비누를 깎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첫 비누 조각이 ‘번역-그리스 조각상’(1998)이었다. 그리스 로마 조각상부터 화려한 무늬의 17세기 중국 도자기까지, 불상부터 영국의 기마상까지 그의 손을 거쳐 비누 조각으로 재탄생했다. 신미경은 유학생인 자신처럼 의외의 장소에 놓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문화적 번역’의 재료로는 때도 의미도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비누가 제격이었다.
지난해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의 한국 미술’ 전시를 열었다. 북미 최대 규모 한국 현대미술전이었다. 신미경은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라는 제목으로 미술관 야외 광장에 대형 비누 조각들을 세웠다. 이 미술관 건물 외부에 놓인 신상들 중 ‘동양의 신’들만 골라 만들었다. 서구인들이 상상한 동양의 신을 한국 미술가가 다시 조각한 ‘번역의 번역’이었다. 작품은 전시 기간 내내 서서히 마모됐다.
이번엔 서양의 신, 천사다. 오랜 세월 미술가들이 상상해 그려온 이미지를 그대로 비누 조각으로 만들었다. 추상화를 닮은 ‘비누 회화’들도 내놨다. 2톤 가까이 녹인 비누를 큰 틀에 부어 굳힌 ‘라지 페인팅(Large Painting)’ 시리즈다. 작가는 “화장실 비누 조각도, 벽에 걸린 비누 회화도 제가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없고, 같은 걸 재연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하찮은 비누에서 철학적 매력을 찾아낸 신미경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13), 하인두예술상(2023), 서울예술상(2024) 등을 수상했다.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김성은 운영부장은 “서도호·강서경·홍승혜 등 미술가들도 이곳 어린이갤러리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줬다. ‘비누로 만든 천사’에서 영감을 얻어 가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년 5월 5일까지, 무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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