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이라 불리던 때의 내 연주, 엉터리였다”

김호정 2024. 6. 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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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혼자서 피아노 한 대와 악보만 가지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강정현 기자

피아니스트 백건우(78) 마음속에는 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는 지난달 21일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8명을 공개 레슨 했다.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공연과 워크숍을 하는 ‘열혈건반’ 행사에서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노래하라.” “숨을 쉬어라.” “들어라.”

그를 지난 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만났다. 화창한 제주에서 모차르트 공연을 마치고 왔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숨 쉬고 들으라는 말이 뭔지부터 물었다.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꺼냈다.

“공개 레슨을 잘 안 하는데. 미국에서였나, 한 학생이 자신의 소리를 전혀 못 들어. 피아노를 치기만 하지. 그래서 ‘들리니’ 물었더니 답을 못해. 피아노 3중주 팀도 있었는데 마찬가지였어요. 무대에서 연주할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기에서 연주하면 청중이 소리를 전혀 못 들어. 연주만 할 뿐 듣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빨리 공부하고 완성하는 건 능률일 뿐”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전국에서 열고 있는 독주회 중 서울 강동아트센터의 공연장면. [사진 판테온]

Q : 그럴 땐 어떻게 가르치나요. 듣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 아닐까요.
A : “타고 나는 비중이 정말 크긴 해요. 그다음은 훈련이죠. 무엇보다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게 가장 중요해요.”

Q : (어린 시절) 어떤 독립의 과정을 겪으셨나요.
A : “(15세에)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음악이 뭔지, 피아노가 뭔지 모르고 그냥 친 거예요. 한마디로 엉터리지. 어려운 곡을 쳤다 해서 최연소다, 최초다 했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미국에 갔으니 이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경험이 너무 안 좋아 오히려 피아노와 거리를 두게 되더라고. 음악은 끌리는데 악기가 두려운 거라.”

Q : 10세에 그리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고 ‘신동’ 칭호를 들었고. 그런데 어떻게 엉터리라고 느끼셨죠.
A :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소리를 즐기고 뭔가 만들고 한 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칭찬하면 거짓말 같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내가 삶을 어떻게 살고, 음악을 어떻게 할 건지 답이 안 나와. 앞이 캄캄했죠.”

2011년 연평도에서 포격 사건을 겪은 섬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야외 공연을 열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 [연합뉴스]

Q : 어떻게 하셨나요.
A : “중요한 건 음악이 좋아서 떠날 수 없었다는 거예요. 음악에 관한 건 뭐든지 했어. 노래 반주, 실내악, 오페라 반주, 보컬 코칭의 반주, 발레 연습 아르바이트,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연극 반주. 하여튼 다 했어요. 줄리아드 음악원에는 또 좋은 클래스가 많아서 콘트라베이스, 첼로 이런 반주도 다 하고.”

Q : 그러다가 답을 찾으셨나요.
A : “어느 날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잘났든 못났든 다 다르고, 내 자리도 어딘가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피아노겠다. 이제 좀 집중해보자’ 했죠. 스물셋, 스물넷쯤 됐을 때일 거야.”

Q : 그때 미국에서 콩쿠르 입상도 하고, 화려한 독주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거죠.
A : “근데 내 질문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어요. 훌륭한 연주를 듣고, 선생님의 좋은 충고를 받아도 그게 다 남의 아이디어잖아. 내 음악이 뭔지 찾아야겠다 싶었지. 그래서 유럽에 온 거고. 운 좋게 프랑스의 어떤 분이 집에 와 있으라 했어요. 거기에서 한동안 외부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렸어요. 낡은 피아노 앞에서 악보만 가지고 혼자 공부를 시작했지. 그리고 매일 걸었어. 주위를 다 보면서 걸었지.”

Q : 혼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한 거군요.
A : “내가 지금 꼭 해야 하는 게 뭔가를 깊이 고민하게 됐지. 혼자 생각하면서부터 알게 되더라고. 라벨·무소륵스키 전곡을 녹음하는 아이디어를 선생님들이 준 게 아니거든요. 그 음악들이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어. 내가 좋았고, 사람들도 여기 빠질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했던 거예요. 자기가 보고 느끼고 찾아가야 돼.”

Q :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죠. 요즘처럼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는 어렵기도 하고요.
A : “빨리 공부하고 완성하는 건 그냥 능률이지, 본질을 제대로 알 수는 없어. 좋아하는 걸 발견했을 때의 희열, 악보에 대한 열정과 사랑, 이런 걸 느낄 수가 없잖아.”

Q : 그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백건우가 있는 걸까요.
A : “그건 틀림없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또 시대 때문일 수도 있지.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었거든요. 근데 계속 내성적일 수는 없었지. 어느 날 프란츠 리스트가 들리기 시작하고, (1982년 파리에서 여섯 번) 연주하면서 내성적인 게 바깥으로 나오는 게 느껴졌어요. 그 작곡가를 연주하려면 내성적이어서는 안되니까. 긴 여정 중의 한순간이었죠.”

Q : 언제나 모든 버전의 악보·문헌을 구해서 철저히 연구하시죠.
A : “연주 여행을 갈 때마다 지역 도서관, 국회 도서관, 옛 악보 서점 같은 데를 다 돌아다녀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도 버전이 다섯 개가 있는 걸 아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돌아다니며 찾았고. 버전마다 다 찾는 거지. 어떤 때는 엉뚱하게 미국 시골의 음악학원에서 악보를 찾아. 드뷔시가 피아노 연주법에 관해 쓴 악보를 찾고 너무 기뻤어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궁금하고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자연히 그렇게 하게 돼. 시간은 들지.”
“본질을 완전히 이해? 그건 잘못된 길”

젊은 시절의 백건우. 그는 15세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20대 초반에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앙포토]

Q : 요새는 지루하고 시간 걸리는 일을 못 견디죠.
A : “연주해보면 신기해요.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곡을 ‘그래도 훌륭하다’고 여겨서 연주하면 그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해. 메시앙, 부조니, 그리고 슈만의 ‘유령 변주곡’, 모차르트 ‘프렐류드와 푸가’…. 진실된 음악이라서 그래요. 그 작품이 우리에게 정말 주는 게 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있다는 믿음으로 계속 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한겹 두겹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해.”

Q : 그러면 본질에 도달하게 되나요.
A : “완전히 이해하고 끝을 봤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그건 잘못된 길로 간 거야. 미켈란젤로도 다비드상을 미완성이라고 했다잖아요. 그게 우리 길이야.”

Q : 그 과정은 즐거운가요.
A : “괴롭기도 하고 남이 상상 못 할 희열도 느끼고. 나만이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세계도 발견하고. 음악은 무한한 힘이 있거든. 그런데 요즘은 음악가가 너무 직업적이 돼버린 것 같긴 해요.”
“자기한테 주어진 것 할 때 가장 행복”

Q : 요즘 젊은 예술가들도 천천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 과정을 갈 수 있을까요.
A : “있겠죠. 힘들겠지만. 예술을 하다 보면 얼마든 쉽게 살 수 있잖아. 근데 진짜 예술가들은 다 어렵게 살았어. 그 사람들이 그 삶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쉬운 삶은 자기 게 아닌 거지. 나도 절망할 때도 많았고, 큰돈도 벌 수 있었고, 쉽게 갈 수도 있었지. 그래도 이게 내 삶인 것 같아. 그 이상도 안 바라고.”

Q : 광고 촬영 제의도 많이 들어왔죠.
A : “별 광고가 다 들어왔어. 진희 엄마(고 윤정희 배우)만 찍자, 같이 찍자, 아기랑 찍자. 하나도 안 했어. 나는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던 삶을 돈과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은 과정은 생각 안 하고 이름만 필요한 거잖아.”

Q : 느리고 힘들게 걸어오신 과정을 지키고 싶으신 거죠.
A :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할 때 행복해. 누굴 본뜨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등수 없는 콩쿠르도 만들고 싶어. 우리가 도와줄 사람들만 뽑아서 도와주는 걸 하고 싶어요.”
백건우는 “젊은 음악가들이 음악에 푹 빠져서 살고, 자신만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기회를 언젠가 마련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도 천천히 곱씹으며 선택한 작곡가, 모차르트를 연주한다. 68년 피아니스트 인생의 첫 모차르트 녹음이다. “내 머릿속에서 제일 많이 떠도는 단어는 언제나 데뷔”라고 했다. 백건우의 모차르트 무대는 11일 서울, 15일 인천, 21일 함안으로 이어진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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