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 주권’이란 말 속에 숨어 있는 위험 [신율의 정치 읽기]

2024. 6. 9. 21: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민의힘·민주당 저마다 ‘당원 500만 육박’ 자랑
민주당 ‘당원 주권’ 주장에 당헌당규 개정 논란
직접민주주의 강조하지만 대의민주주의 합리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5월 23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당원주권시대 더불어민주당 부산·울산·경남 컨퍼런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사이 민주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당원 주권’ ‘당원이 주인인 정당’ ‘직접민주주의’ 등이다. 그럴듯하게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런 단어는 매우 ‘위험’하게 느껴진다.

‘당원 주권’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과 같은 주장은 대중 정당(Mass Party)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서나 나올 수 있는 용어다. 전형적인 대중 정당은 20세기 독일의 사민당, 영국 노동당 그리고 프랑스 사회당 같은 20세기 유럽 좌파 정당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유럽 정당은 이념적 색채가 분명했다. 하지만 사회적 변화는 이념적 색채를 희석시켰다. 이른바 탈근대화(Post Modernization) 때문이다. 탈근대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집단적 이익보다 개인 이익이 대두되는 것, 그리고 물질적 모순 구조보다는 삶의 질을 중시하는 태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정당의 기원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 정당은 거의 예외 없이, 집단적 이익을 제도권에 투영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독일 일반 노동자 연맹(Allgemeine Deutsche Arbeietr Verein·ADAV)’이 정당으로 변한 것이다. 자본가도 마찬가지다. 독일에서 노동자 정당이 등장하자, 자본가들은 ‘중앙당(Zentrumspartei)’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제도권 내에서 자신들 이익을 대변하고자 했다. 이렇듯 유럽 정당은 이념에 기반해 ‘집단적 이익’을 제도권에서 대변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집단적 이익보다 개인적 이익이 더 중요시되는 사회기 때문에, 정당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으니, 당원 수 감소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보여진다.

현재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당원 수가 500만명에 육박한다며 자랑한다(이것이 ‘자랑거리’일지는 의문이다). 진짜 500만명 당원을 확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원 수가 많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당이 탈근대, 후기 산업 사회와 동떨어져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우리는 왜 21세기에 살면서 유독 정당 구조는 20세기에 머물러야 하는지 되물어야 할 판이다.

필자 견해로는, 500만명이라는 당원 숫자는 과장됐고 실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당원은 소수 ‘정당 활동가’일 것이라고 본다. 이런 소수의 정당 활동가는 침묵하는 다수를 압도한다.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즉, 소수 정당 활동가들이 ‘다수’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좌우한다는 얘기다. 이런 환경에서 ‘당원 주권’ 혹은 ‘당원이 주인인 정당’을 주장하면 결국, 당은 ‘소수의 정당 활동가들의 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탈근대화 사회에 사는 일반 국민과는 유리된 ‘강성 집단이 지배하는 정당’이 된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지 않다. 우리나라처럼 국민 수가 5000만 넘는 국가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직접민주주의를 하려면 투표를 자주 해야 한다. 5000만 넘는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투표를 자주 실시하면,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난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가장 많은 국가다. 스위스는 인구가 880만명 정도 되는 소규모 국가면서 또한 철저한 연방제 국가다. 즉, 소수 국민이 26개 주에 분산돼 살고 있어, 주 단위 주민투표가 가능하다. 그래서 아주 작은 문제도 투표로 해결할 수 있는데, 실제 스위스 작은 주에서는 ‘사육하는 소의 뿔을 제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주민투표를 실시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투표를 자주 하다 보면, 투표율이 높을 수가 없다. 스위스에서는 투표율이 40%를 웃도는 경우가 많지 않다. 투표율이 낮으면, 직접민주주의를 한다 해도 선거를 통해 채택된 정책이나 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힘들다. 일각에서는 모바일로 투표하면 된다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투표의 기본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스위스와 같이 자주 투표를 하는 국가에서도 모바일 투표를 거부하는 이유가 있다. 모바일 투표는 투표의 4대 원칙 즉 직접, 비밀, 평등, 보통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결국 현존하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는 대의민주주의다.

민주당은 ‘당원 주권’ 혹은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을 주장하며, 국회의장과 원내대표 선출 시 20%의 당원 의견을 반영하도록 당헌당규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상당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국회직’과 ‘당직’을 구분해야 하는데 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회의장은 ‘당직’이 아니라 ‘국회직’이다. 국회의장은 당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이끄는 사람이다. 그런 국회의장을 ‘당원’도 참가해 뽑는다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국회법 15조 1항에는 “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거하고 재적의원 과반수의 득표로 당선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판은 희한하게도, 국회 1당이 자당 내부에서 국회의장 후보를 선출하고 해당 인사를 본회의에서 ‘인준’하는 방식으로 의장단을 선출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이런 방식부터가 문제다. 법을 만들고 지켜야 하는 국회가 ‘관례’라는 이름으로 ‘무기명투표’ 의의와 취지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국회법 취지를 살리려면, 의장이 되기를 원하는 의원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출마하고, 이들 중 한 명을 의원들이 선택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국회 1당이 당 내부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으니, 잘못된 관례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회의장 후보를 1당 소속 의원들이 선출한다는 사실이다. 의원들은 ‘민의를 대행’하는 이들이기에, 이들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이끌 수장을 선택할 수는 있다. 당원들이 이런 의장 선출 과정에 참여하는 것과는 사인이 다르다. 민주당이 원내 1당이라, 당 소속 의원들이 의장 후보를 선출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쳐도, 민주당 당원들을 ‘민의를 대행’하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들을 의장 선출 과정에 참여시킨다면, 이는 국회를 ‘민의의 전당’에서 ‘진영의 전당’ 혹은 ‘민주당 독점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꼴이 된다. 이는 정말 문제다. 민주주의 가치가 소수 의견이라도 제도에 반영하는 것이고 이런 가치의 실현을 위해 국회의장은 당적도 버리는데, 이런 식으로 의장을 선출한다면 ‘극단의 정치’를 제도화하는 셈에 지나지 않는다.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소수 정당 활동가들이 지배하는 정당은 포퓰리즘을 만연시킨다. 포퓰리즘의 특징은 돈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지금 민주당에서 나오는 소리가 위험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3호 (2024.06.12~2024.06.18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