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해냈다고? 고3 교실에선 볼멘소리 나와
[서부원 기자]
▲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전공의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오는 17일부터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 필수 부서를 제외한 전체 휴진에 들어간다고 6일 밝혔다. 사진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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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나 고우나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윤석열 대통령이 해낸 건 맞잖아요?"
의대 정원을 늘렸다는 점에 대한 한 지인의 후한 평가다. 대선 이후 2년 넘는 동안 처음 듣는 윤 대통령 칭찬이라 낯설고 어색했다. 정책의 입안과 추진 과정이 정교하진 못해도 검찰 출신 특유의 뚝심으로 일궈낸 성과라며 엄지손가락을 켜세웠다. 바닥을 기고 있는 지지율도 조만간 반등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함께 내놓았다.
그의 말에 부러 대꾸하진 않았다. 단지 사람에 따라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천양지차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전공의 대부분은 병원에 복귀할 생각이 없고, 일부 대학 병원은 무기한 휴진을 결행할 만큼 의료 현장이 무너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 탓이지 정부를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거다.
이참에 의사들의 높은 콧대를 꺾어놔야 한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의사협회를 압수수색도 하고, 면허 박탈까지도 염두에 두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라며, 여론의 지지를 받는 지금이 의료 개혁의 적기라고 명토 박았다. 실기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정부에 대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과 의사협회의 반발은 직역 이기주의에 매몰된 몽니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그들은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방패 삼아 역대 정부가 추진했던 의료 개혁을 매번 무릎 꿇려 왔다. 그 와중에 의사들이 '갑'이고, 정부가 '을'이라는 현실을 온 국민이 절감했다.
의대 정원이 3058명에서 하루아침에 4695명으로 늘었다. 50%가 넘는 수치다. 누구는 의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외과와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 의료과의 의사 부족이 문제라고 하고, 다른 누구는 의사들의 수도권 쏠림 현상에 대한 해결이 황급하다고 말한다. 이든 저든 의대 정원의 확대는 전제 조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정부의 '막무가내'식 추진으로 정책의 취지마저 곡해되고 훼손되는 형국이다. 애초 결론을 내려놓고, 추진 과정에서 발생할 숱한 부작용은 각급 기관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이어서다. 만시지탄이지만, 온 국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책이라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신중하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의대 정원 확대, 불안한 고3... 정부는 몰랐을까
당장 의대 정원 확대가 일선 학교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의대 진학을 염두에 둔 최상위권 아이들에게 희소식이고, 현재 명문대 재학생들의 반수가 늘어날 거라는 예측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의대 정원 문제가 온존한 학벌 구조와 맞물리면서 대입 전형을 통째로 뒤흔드는 모양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걸 정부만 몰랐을 리 없다.
"정부가 우리더러 재수하라고 등 떠미는 꼴이죠."
올해 고3인 한 아이의 푸념이다.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이번 의대 정원 확대는 달갑지 않다.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의대 진학을 꿈꾸는 재수생들과 반수생들이 쏟아지면서, 그들에 밀려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추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알다시피,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은 'N수생'들의 독무대다. 수능에서 지금 고3이 그들의 성적을 넘어서기란 여간해선 어렵다. 고3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선 학생부종합전형을 비롯한 수시 전형 말고는 사실상 답이 없다. 문제는 수시 전형을 너끈히 통과했다고 해도 수능 최저 등급이라는 관문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 4일 오전 서울 양천구 목동종로학원에서 열린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평가원 6월 모의고사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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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미래 과학자를 꿈꾸며 묵묵히 공부해 온 아이들의 마음에도 적잖은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명문대 공대는 물론, 과학기술원과 에너지 공대 등 특수목적대학에 재학 중인 이들조차 의대로 갈아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는 거다. 자신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단다.
의대 정원 확대가 연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은연중에 명문대 공대가 의대에 가지 못한 이들의 '2등 진로'인 양 여겨지게 됐다며 분노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서 과학자는 의사 아래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보편화하고 있다. 'SKY서성한중경외시' 읊듯, 이젠 아이들의 뇌리엔 직업조차 서열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최근 들어 의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면서 다른 진로를 고민하던 최상위권 아이들이 대부분 돌아섰다. 과거엔 의대에 갈 성적이 되는데도 공대나 사범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고, 의사를 꿈꿨지만 성적이 부족해 차선책으로 간호학과로 진학하는 아이도 드물지 않았다. 이제 더는 그런 사례를 보기 힘들게 됐다. 의대는 무조건 성적순이다.
성적 좋으면 무조건 의대를 권하는 시대
"네 성적이 아깝지 않니? 나중에 편히 살려면 의대 진학이 '국룰'이야. 적성이야 살아가다 맞춰가면 되는 거고. 노벨상 못 받을 거면 과학자는 배고픈 직업이야. 운 좋게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해도 50살에 이르기도 전에 퇴직하는 건 우리 사회의 불문율이고."
진로 상담이랍시고, 학부모도, 교사도, 심지어 또래 아이들조차 이렇게 조언하는 세태다. 의대 정원의 확대가 이공계열 학과의 인기 추락과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정원의 연쇄 이동을 몰고 올 게 불 보듯 환하다. 물론, 그 도미노 현상의 끝은 의대를 제외한 지방대의 붕괴다. 지방의 사립대의 경우, 이미 백약이 무효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의대 정원의 확대는 일선 학교의 진학 지도와 진로 탐색 교육과정, 개인별 적성 검사 등을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부의 정밀하지 못하고 즉흥적인 대입 정책 추진이 교육 현장에 끼친 폐해다. 지난해 '킬러 문항 출제 배제' 소동에서 최근 '무전공 선발 대폭 확대 방침'에 이르기까지, 불쑥불쑥 꺼내는 정부의 설익은 정책들은 오늘도 '좋아 빠르게 가는' 중이다.
늘 그래왔듯, 정책의 부작용에 따른 고통은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몫이다. 일부 아이들조차 "윤석열 대통령은 말만 앞세웠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며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윤석열 대통령이 해냈다'며 상찬했던 지인에게 건네려던 답변을 아이들이 대신해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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