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위급"... 동학군, 일본과의 전쟁 준비 들어가다

이영천 2024. 6. 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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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진과 전봉준의 풍모... 한국에 참된 보수 있는지 묻게 하는 1894년 풍경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지사(志士)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큰 뜻을 품은 사람'을 이른다. 나라는 늘 이들에게 기대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소통이 관건이었다. 왕과 신하, 백성 사이 소통이 끊겼다. 이로써 모든 길이 막혀 버렸다. 지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뜻이 같으면 소통은 이뤄진 거나 진배없다. 서로의 처지나 이해관계를 떠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 뜻에 손쉽게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차이나 방법은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조선은 그러지 못했고, 불행히도 망국의 길로 빠졌다.

1894년, 나라는 엉망진창에 풍전등화였어도 분명 지사는 있었다. 그 수 또한 수만 명이었다. 그 수만의 대표가 전봉준을 비롯한 몇이었다. 양심적 관리로서 김학진도 탁월한 지사의 풍모를 보여 주었다.

앞선 행적으로 보아, 보수적 가치에 천착했음이 분명한 나주 민종렬이나 운봉 토호 박봉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략적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세우자는 전봉준의 뜻에 소극적이나마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라는 최소의 의무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이게 보수의 가치요, 참된 보수주의자다. 오늘날 대한민국엔 지사는커녕 참된 보수주의자는 있는지? 혹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들 세상은 아닌지?

전봉준의 뜻에 동의한 이들... 선화당에 마주 앉아

첫 편지 후 김학진은 두세 차례 더 전봉준과 연락을 취한다. 조정은 일본 꼭두각시로 전락하였고, 강산은 청일전쟁에 무참히 짓밟히는 와중이다.

김홍집 내각에서 병조판서를 제수받은 김학진은 이를 거부하고 전라감사로 눌러앉을 심산이다. 그는 동학혁명군과 힘을 합해 일본군 침탈에 능동적으로 대비하려 마음먹은 듯 보였다. 명분은 관민상화(官民相和: 백성과 조정, 관민이 서로 협의한다는 뜻)이다. (관련 기사: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 https://omn.kr/28vq0 ).
 
▲ 풍남문 전주성 남문, 후면에 '호남제일성'이란 글귀가 보인다. 1894년 여름 백마 탄 전봉준 일행이 이 문을 통해 선화당에 든다.
ⓒ 이영천
 
7월 6일. 백마 탄 전봉준이 약간의 호위병과 전주 풍남문에 나타난다. 비무장으로 최경선 등과 차분하게 선화당에 든다.

지사끼리는 눈빛만 보아도 알아보는 법이던가. 둘은 즉시 서로를 신뢰하며, 처지를 떠나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지사의 풍모를 보인다. 믿음이 바탕인 차원 높은 소통을 이어간다.

나라 안팎 정세와 청일전쟁,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특히 일본의 흉계에 대해 긴 시간 대화를 이어간다. 인품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서로 같은 점은 높이고 다른 점은 차이를 좁혀나가는 무척 세련된 대화를 나눈다. 겸손과 진지함으로 진정성이 돋보였고, 배석한 최경선과 김성규도 훌륭한 조역을 수행한다.
 
봉준이 전주로 들어올 때 …(중략)… 가까운 동지 사오십 명과 함께 들어왔다. 선화당에서 학진을 만났는데, 학진이 길 양편에 무장군인을 배치해 놓았으므로 봉준 등은 긴장하여 얼굴색이 변하였다 …(중략)… 마침내 진심으로 함께 이야기 나누며 속마음까지 드러내 보여 의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군대의 지휘권을 봉준에게 넘겨주었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p197~198 의역 인용)
 
7월 7일, 김학진은 감사 권한으로 각 고을에 관문(官文)을 낸다. '각 수령은 집강소를 인정하고, 동학혁명군과 협의해 폐정을 개혁하라'며 집강소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유일한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이다.

전봉준도 동학혁명군 총대장 자격으로 각 고을 집강에게 '감사와 관민상화 정신으로 모든 일을 협의할 것이니 각 고을 집강도 수령과 협의하라'는 통문을 돌린다.

이로써 집강소를 통괄하는 동학혁명군 총대장이 전라도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런 합법적 시공간은 일본과 전쟁을 준비할 토대가 되었다. 김학진은 선화당을 비워주며, 각 고을로 나가는 감결(甘結), 지금으로 치면 행정적 지시 공문인 것에 자기 이름도 넣어 달라 당부한다.
 
▲ 선화당 전봉준과 김학진의 회담 후 대도소가 차려진 선화당. 2차봉기 전까지 전라도의 실질적 통치기구였다.
ⓒ 이영천
 
이에 전라도를 통괄하는 도(道) 집강소가 설립되어 명칭을 '전주 도소 혹은 대 도소'라 칭했다.

이에 유생들 원성이 들끓는다. 이를 빗대어 동학군 전라감사인 '도인감사'라는 말이 퍼지기도 한다. 비아냥거림이 요즘의 수구 언론 뺨친다. 조정의 비난도 빗발친다. 김학진을 탄핵하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군국기무처 김가진이 김학진을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나선다.

집강소는 정통성을 확보했다. 권위와 동시에 우월한 도덕성으로 백성자치의 힘을 배가해 나갔다. 농민들은 진정 꿈꾸던 세상을 이뤘다고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벌어질 큰 싸움에 대한 준비도 착실하게 진행한다.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했으며, 군자금도 착실하게 비축해 나갔다.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인 이유

그간 오권선의 나주성 공격이 실패했고, 운봉은 다시 박봉양에게 넘어갔다. 김개남은 노골적으로 전봉준과 김학진의 관민상화에 비협조적이다. 더하여, 추석 뒤 김개남의 독자적 봉기설이 무성해진다.

수백 명 지리산 포수들로 부대를 꾸렸다는 풍문이 떠돈다. 또한 김인배 하여금 동부 전라도와 서부 경상도 세력을 규합, 봉기에 합류시킨다는 말들이 횡행한다.

전봉준은 청일전쟁과 국내·외 정세, 그리고 동학혁명군에 겨눠질 총부리에 대한 대비책으로 밤샐 정도다. 청일전쟁 전황은 점차 일본으로 기울어 간다.
 
▲ 나주목사 내아 나주목사가 정무 외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내아. 전봉준이 민종렬을 만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 이영천
 
이런 상황에서 혁명군에 저항하는 나주가 큰 걸림돌이다. 이에 전봉준이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직접 민종렬을 만나 담판 짓기로 한다.
 
▲ 나주성 서문 동학농민혁명 기간 혁명군과 관군의 전투가 벌어진 나주성 서문.
ⓒ 이영천
   
전 대장이 수하 몇과 나주 읍에 이르니 서문을 지키는 태세가 엄중하다. 이런 위험지임에도 불구하고 전 대장이 동문에 들어 바로 관사에 들어섰다. 주위는 이 광경에 무척 당황하였다. 이때 목사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황망히 일어나 묻기를 "손님은 누구십니까?" 하였다.

전 대장은 스스럼없이 "나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이외다" 목사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줄 모르자 전 대장이 "목사는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대도 조선인 나도 조선인인데, 같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인 대하기를 어찌 이처럼 섭섭하게 한단 말이오. 지금 우리나라는 외국이 독한 손을 내밀어 침략을 꾀하고 국정은 나날이 틀려가고 있느니 나라 존망이 얼마나 위급한지 그대는 알고나 있으시오? 미혹한 그 꿈에서 어서 빨리 깨어나셔야 합니다" 하니 목사 전 대장의 기풍을 보고 언사를 들음에 간담이 서늘하고 말문이 막혀 감히 한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다.

오직 머리 숙이며 전후 까닭 듣기를 청할 뿐이라. 전 대장이 다시 천하대세며, 홍계훈과 강화하던 일이며, 각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서로 국사를 논의하는 등 전후 경과를 낱낱이 설명하니, 사유 그럴듯하고 위풍 또한 늠름하여 목사는 다만 한마디 말로 순순히 따름으로써 이날부터 집강소를 설립하여 정사를 보게 하니라.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3~225 의역 인용)
 
▲ 정수루 나주관찰부 정문인 정수루. 나주에 든 전봉준이 지나 간 문이다.
ⓒ 이영천
   
와중이던 8월 20일, 김개남 봉기설이 현실이 된다. '8월 27일 봉기할 것이니 25일까지 남원에 집결하라'는 통문이 돈다. 그러자 모든 게 급박해진다.

이즈음 흥선대원군이 동학혁명군에 밀지를 보냈다는 설이 있다. 전봉준과 김개남 중 누가 받았는지 명확지 않으나, 재봉기를 서두른 점으로 미루어 김개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하지만 당장 봉기하기엔 모든 게 너무 부족하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김개남을 찾는다. 이 만남이 '남원상회'다. 주변을 다 물리친 전봉준과 김개남 단둘이서 비밀리 상의하며 혹은 언쟁으로 혹은 합의해 가며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였다고 '남원 동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 교룡산성 남원에 주둔 중이던 김개남이 진을 친 교룡산성. 2차봉기 전 남원상회는 이곳에서 열렸을 개연성이 높다.
ⓒ 이영천
 
결론은 재봉기다.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준비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가을걷이가 끝나야만 군사를 모을 수 있다. 아울러 무기와 훈련, 군자금과 군량미 등의 준비가 부족했다. 김개남의 봉기령에 남원에 모인 농민군이 7만이다.
전봉준은 나주와 마찬가지로 운봉으로 걸음을 뗀다. 박봉양과 담판으로 '상호불가침'을 약속한다. 재봉기는 일본군과의 싸움으로, 결코 운봉을 침략할 까닭이 없다는 요지로 그를 설득한다.
 
봉준이 말을 타고 혼자서 운봉으로 들어가 박봉양에게 "지금부터 개남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도인들의 왕래를 막지 않으면 개남 또한 장차 귀화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운봉 백성들은 전쟁의 해독을 입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황현의 앞의 책. p228 의역 인용)
 
이제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만 몰두해야 한다. 봉기는 추수가 끝나는 때가 될 것이다.

월등한 화력으로 무장했으며, 군사적으로 잘 훈련된 일본군을 이기려면, 병력 10만은 모아야 한다. 그리하더라도 승리가 담보되는 건 아니다. 그러함에도 싸워야만 한다. 설혹 패한다 해도 침략과 잘못된 야욕에 맞서 초개와 같이 맞서야 한다. 그게 나라이고, 참된 백성이며 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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