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집회의 중심역할을 하다
[김삼웅 기자]
▲ 마을 유래 보은집회 당시 동학교도 수만 명이 앞 냇가 평지에서 20여 일 농성했다는 내용이 있다. |
ⓒ 이영천 |
고종 정부가 1886년 천주교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1887년 4월 아펜젤러가 서울에 정동교회(감리교)를 설립하고, 9월에는 언더우드가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장로교)를 설립하였다.
외래종교는 허용하면서 동학은 끝내 허용하지 않았다. 민중의 사무치는 한을 외면한 것이다. 복합상소 후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평소 온건한 성품으로 동학을 종교의 영역으로 여기고 정신적으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간부들은 방향을 바꾸었다.
최시형은 1893년 4월 25일 충청북도 옥천 창성면 거포리에 있는 김연국의 집에서 수운 순도기념 제례를 지내면서 거사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청주·보은·옥천 지역에 사는 간부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동학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즉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는 것이 정의"라는 명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보은에 8도의 도인을 모아 서울에서 이루지 못한 교조신원운동을 재개하기로 하고, 여기서 결정한 <통유문>을 각지에 보내어 보은 장내리로 모이도록 하였다.
통 유 문
대저 우리 도는 음양으로써 곧 하늘의 체로 하고, 인의로써 곧 사람답게 하며, 천인 합덕으로 자연스럽게 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된 자로서 힘써 어버이를 섬겨야 하고, 신하로서 목숨을 다해 임금을 섬겨야 하니 이것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큰 도리인 것이다. 우리 나라가 단군·기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의를 숭상하며 익혀왔음은 천하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면서 안으로는 덕을 닦아 바르게 다스리는 정사가 미거하고 밖으로는 침략세력이 더욱 떨치게 되었다.
관리들은 더욱 빗나가 포악 방자해져서 멋대로 위협하여 굴종시키고, 힘센 호족들도 서로 다투어 토색해 거두어들이니 기강이 문란해졌다. 학문에서도 경망스럽게 지리멸렬하여 제각기 문호를 세우고 있다. 백성들의 형편은 움츠리고 움츠려들어 버틸 여력이 없다. 벗겨내 없애는 그 재앙과 거듭되는 화가 조석으로 닥치니 평안할 수가 없다. 참으로 뜻이 있는 이라면 가슴을 치며 탄식할 일이다.
우리 모두 사문의 화에서 살아남았으나 아! 스승님의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그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 성상께서는 자애롭게 각기 생업에 충실하면 큰 혜택을 베풀어 소원을 들어주려 했으나 어찌하여 지방 관속들은 임금님의 홍은을 입은 생각은 않고 여러 모로 침탈함이 전보다 더 해 간다. 우리 모두는 망해버릴 것이니 설사 편안히 살려 하여도 어찌 할 수 있으랴.
생각다 못해 다시 큰 소리로 원통한 일을 진정하고자 이제 포유하니 각 포 도인들은 기한에 맞추어 일제히 모이라. 하나는 도를 지키고 스승님을 받들자는 데 있으며, 하나는 나라를 바로도와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계책을 마련하자는 데 있다. (주석 1)
서울의 교조신원이 정부의 속임수로 무위에 그치고, 상경했던 도인들은 귀가하지도 못한데다 관헌들의 토색질이 더욱 심해진 상태에서 1893년 3월 중순 동학도인 2만여 명이 보은에 집결하였다.
〈척왜양창의〉라고 쓴 깃발을 날리면서 동학도인들은 보름 동안 농성을 유지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척왜·척양의라는 큰 기를 세우고 다시 각 접을 표시하는 충의·선의·청의·경의·홍경·무경·상공 등등의 중기(中旗)와 함께 오색소기를 다섯 곳에 끼어서 세우며 기세를 돋구고, 밤이 되면 장내의 근처 집집에 분산하여 기숙시키는데, 숙식비에 대한 계산도 분명하게 하는 등 민폐도 조심하였다." (주석 2)
보은에 모인 2만여 명에 달하는 도인(군중)들은 척왜척양의 역사의식을 동학정신으로 접목하는 데에 뜻을 같이 하였다.
보은에서 대규모적인 동학도인들의 집회에 놀란 정부는 보은군수를 현지에 보내 도인들을 타일러 해산토록 종용했으나, 오히려 교조신원과 척왜척양, 보국안민의 주장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거센 항의를 받고 물러났다.
정부는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해산하는 것과 청국에 병력을 요청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어윤중을 선무사로 보내어 동학지도부와 타협케 하였다. 동원할 병력이 모자랐고, 청국의 파병요청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최시형은 정부측과 타협의 결과 농사철이어서 도인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탐관오리의 대표급으로 동학 측에서 지목한 감사 조병식과 영장 윤영기 등이 처벌되었다. 보은집회는 당초의 목적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동학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하여 협상할 만큼 종교적인 결집력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성과는 곧 동학농민혁명의 마그마로 작동하였다.
한양의 복합 상소운동에 봉소인으로 주요한 역할을 한 춘암은 해월에 의해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보은집회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춘암은 덕의대접주로 임명되어 보은신원 운동에서 핵심역할을 했다. 박희인도 예산대접주로 임명되어 보은으로 집결해 내포지역에서는 두 개의 거포(巨包)가 참여하였다. 다른 지역에는 아산포대접주 안교선도 보인다. 당시 50여 포가 있었던 것을 보면 춘암이 중심인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의대접주로 임명된 춘암은 관내의 도인들의 대오 정렬과 일사분란한 질서 유지, 심고와 주문 외우기 등을 지휘하였다. 춘암은 위생에 특히 신경을 써서 대소변은 물론 침이나 코를 함부로 뱉지 않도록 지도하였고 경거망동 등도 자제하라고 타일렀다.
▲ 장안리 동쪽 삼가천 변 장안리 동쪽. 이곳에서 보은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
ⓒ 이영천 |
춘암은 내포 지역 동학의 지도적 위치가 되었다. 동학운동사에 큰 방점이 찍히는 보은집회에서도 그의 역할은 막중하였다. 보은집회의 실상을 탐지한 보은관아의 보고서에 그의 행적의 단편이 드러난다.
상주와 선산 사람 100여 명과 태안 사람 수십 명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전과 같이 진을 설치한 후에 진중 안에 있는 아이와 노약자를 모두 내보내어 여러 곳의 집에 분산시켰고, 깃발은 모두 제거하고서 왜와 서양을 배척한다는 글귀의 깃발만 세워놓았지만, 달아맨 등불만 간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제 들어온 수원접의 사람들은 장재들이어서 장내리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오시(午時)쯤에 광주 사람 수 백 명이 돈(돼지) 네 마리를 실어 왔고, 또한 천안이라고도 하고, 혹은 직산과 덕산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각각 돈을 수십 냥씩 지거나 매고 장내리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길가에는 쌀을 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석 4)
주석
1> <천도교회사 초고(草稿)>, 표영삼, <동학의 발자취>, 410~411쪽, 재인용.
2> <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90~91쪽.
3> <대도주 춘암상사(1)>, 48쪽.
4> <취어>, <총서(2)>. 56~5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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