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이 서펜타인 파빌리온 위에 창조한 또 다른 세계

윤정훈 2024. 6.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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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만들어낸 공간에 수 차례의 붓질을 더해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이희준. 이번엔 조민석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했다.
‘마당: 우리가 모이는 곳’(2024)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Floating Floor No.4’(2019), ‘Biei No.101’(2019), ‘The Reflection of the Past and Present’(2022), ‘The Temperature of Barcelona’(2022)

Q : 조민석 건축가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이미지를 배경으로 이번 〈엘르 데코〉 커버 아트워크를 제작했다. 협업 제안을 받고 어떤 기대가 들었나

A : 2019년 그가 설계한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 작품을 설치한 적 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이 주최한 〈Apmap 2019 Jeju - Islanders Made〉 전시였는데, 당시 제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해 온 ‘사람’을 주제로 작업했다. 조민석의 건축을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건축에 반응하는 작업을 하게 돼 뜻깊게 생각하고 있다.

Q : 파빌리온의 타이틀이자 주요 개념인 ‘군도의 여백(Archipelago Void)’을 어떻게 해석했나

A : 중앙의 보이드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전통가옥의 ‘마당’처럼 작용하는 부분으로, 마당을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열린 공간으로 해석한 데 주목했다. 마당은 결혼식처럼 큰 행사가 열리기도 하지만, 고추를 말리거나 메주를 만드는 일상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규모 집단 행사와 개인 일상 활동을 아우르는 면모가 도드라지는 그래픽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했다. 다채로운 공간으로 이어지는 중심지로서 중앙 보이드의 중요성을 강조해 ‘마당: 우리가 모이는 곳’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가운데 원은 여러 시공간을 연결하고 공유하는 메타적 마당이며, 원의 하단부는 서펜타인 가든의 따스한 온도를 상징한다. 주황색 선은 파빌리온에 포함된 놀이 공간(플레이타워)의 그물에서 형태와 색을 차용했다.

Q : 여행 또는 일상에서 마주한 공간을 작업 대상으로 삼아왔는데, 이번엔 아직 가보지 않은 공간을 상상하며 진행해야 했다

A : 한국인에게 비교적 익숙한 ‘마당’이 주된 컨셉트이고, 어린 시절 마당이 있는 할머니 집에서 자랐던 터라 그런 공간이 어렵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국 유학시절 다른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본 적 있어 대략적인 위치와 규모, 켄싱턴 가든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상상했다.

Q :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촬영한 사진을 기반으로 ‘The Temperature of Barcelona’(2022)를 선보인 적 있다. 공간에 담긴 건축 의도가 당신의 작업에 영향을 주기도 하나

A : 나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공간을 방문한다. 건축물에 담긴 서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만, 건축가나 연구자만큼은 아니다. 오로지 내 시선과 감각을 기반으로 공간을 해석하고 반응한다. 방문 당시의 햇살과 온도, 습도, 향기, 내 상태 등 여러 가변적 요소가 반영돼 기존 건축 서사와 조우하거나 대응하기도 한다. 아마 다른 날 다른 시간에 그곳을 방문했다면 또 다른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명륜동에 있는 이희준의 작업실.

Q : 공간은 오랫동안 이희준이 천착해 온 주제다. 건축 풍경을 그린 초기작 ‘Yellow Scene’(2010~2012)부터 당신에게 공간이 남다른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A : 공간의 어떤 점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탐구하게 만드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아파트 벽면과 오래된 놀이터, 골목길의 상점, 한강 변의 콘크리트 구조물 등 주변에서 흔히 보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에 자주 눈이 갔다. 당시 작업 양에 대한 욕심이 있어 소재가 풍부한 걸 찾기도 했다.

Q : 사진에 회화를 더하는 포토 콜라주 기법을 확립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A : 2019년 무렵, 다양한 재료 실험을 한 적 있다. 기존 작업방식의 한계에 질문이 많았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업해 나갈지 자문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신한갤러리의 〈Painting Network〉 전시에서 테라초 타일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이게 됐다. 기존 색면 회화에 테라초를 함께 구성한 ‘Floating Floor’(2019)가 그것으로, 구상적 형태와 추상적 형태가 교차하는 경험을 했다. 이후 테라초에 해당하는 부분을 사진으로 교체하며 포토 콜라주 기법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Q : A4 용지에 출력한 사진을 캔버스에 붙인 다음 그 위에 물감을 칠한다. 그런데 사진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 건 다소 의아하다

A : 의도한 부자연스러움이다. 모든 이미지는 결국 ‘환영’이다. 갈수록 사진 화소가 높아지고 VR 등으로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지만 내 작품에서만큼은 그림이 지닌 환영성을 부각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진이고 그림이라는 걸 인식하길 바랐다.

Q : 건설현장의 작업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색을 칠하고 선을 긋는 방식도 흥미롭다

A : 대학시절 벽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공사현장 작업자들의 숙련된 작업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실에 추를 매달아 수직 · 수평을 잡는 것, 먹줄 튀기기, 미장, 비계를 세우는 기술이었다. 이를 나만의 표현방식으로 차용하고 있다. 우드 록에 물감을 묻혀 미장하듯 색을 칠하고, 하나의 면을 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건설현장에서 비계를 세우는 것과 유사하다. 완성보다 완성에 가까워지려는 과정이 작업에서 드러났으면 한다.

Q : 당신의 붓질은 캔버스 속 공간의 존재를 가리기도, 특정 포인트를 부각하기도 한다

A : 공간엔 다양한 서사가 존재한다. 우리 일상이 그 속에 있고 경험과 기억도 있다. 나는 이런 부분을 가리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상상을 이끌어낸다. 공간 고유의 이야기에 내 감정과 상태를 반영한 회화 요소를 더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해석을 확장하는 것이다.

작업 중인 작품 앞에 선 이희준 작가.
‘The Orbit of Eclipse’(2024)

Q : 당신의 근작은 이전보다 더 엄격하고 익숙한 비율로 구성된다. 정방형을 가득 채운 원과 그것을 2분의 1에서 4분의 1 비율로 나눈 것인데, 이런 질서는 무엇을 의미하나

A : 오랫동안 작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형태가 생겼다. 균형감이나 비례, 비율 등을 고려한 것도 있다. 원은 위아래 없이 모든 면이 부드럽게 연결돼 한 방향을 향한다. 마치 강한 중력을 향해 수많은 면이 당겨지는 동시에 그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작업에서 원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상정하고 특정 장소를 바라보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렌즈 또는 어떤 세계의 안과 밖을 구분해 주기도 한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바람도 있지만, 아직은 원을 중심으로 화면을 분할하는 형태를 좀 더 탐구하고 싶다.

Q : 작품마다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한 작품에서 의외의 색 조합도 시도한다. 면의 질감도 조금씩 다르다

A : 작품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어떤 상상을 한다. 그것은 가보지 못한 우주일 때도 있고, 미지의 동굴이나 화석이 된 꽃일 때도 있다. 상상의 대상은 화면의 색과 질감, 형태로 구체화한다. 큰 색면으로 전체적인 스토리라인과 방향을 설정하고 작은 점이나 선 등의 요소로 섬세한 분위기를 만든다.

Q : 어떤 작품은 작은 조각으로 만들기도 한다. 작품의 근간이 된 틀을 해체하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A : 오랜 시간 한 매체에 집중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회화에 대한 고민이나 불편함, 어려움이 익숙함, 편안함, 당연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때마다 스스로 질문하고 의심하기 위해 조각을 한다. 평면에서 입체로의 전환은 내게 찾아온 익숙함과 편안함에 작은 모래 알갱이를 넣는 것과 비슷하다. 불편함과 어려움을 곱씹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을 때 비로소 희열과 지속 가능함을 느낀다.

Q : 많은 사람이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캔버스, 그것도 정방형이라는 엄격한 틀을 유지해 왔다. 이희준의 작업에서 틀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A : 틀은 장르를 만들어준다. 나 역시 회화에서 조각으로 이어지는 실험을 하고 있지만, 돌아올 지점이 있다는 건 중요하다. 장르 탈피나 매체 확장, 매체 크로스 같은 실험을 하더라도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고 연구하는 매체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되묻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 모두 클래식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서 또 다른 희망을 볼 때의 즐거움이 있다. 마치 안개 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원이 저 멀리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 새로운 땅의 실루엣을 보았을 때 느끼는 희망과 같은 것이다.

Q : 캔버스에 공간을 들여와 그것을 재구성하고 나아가 조각으로 만드는 방식까지. 어쩌면 당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A : 종종 작업이 최적화된 나만의 작업실을 상상한다. 1960~1980년대 사이에 지어진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단독주택이 이렇지 않을까? 영화 〈싱글맨〉에서 주인공 조지가 사는 집이 좋은 예다. 언젠가 조민석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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