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만 쳐다보네
누구의 문장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데미안〉을 읽는 10대는 조숙하고, 〈데미안〉을 나이 들어 뒤늦게 읽는 이는 미숙하다”라는 말에 공감한 적이 있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도 들어맞는 표현일 것이다. 〈데미안〉과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자신 안으로의 기약 없는 침잠을 탐미적으로 좇는 이야기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유약하고 불안한 청춘의 자아는 자기방어를 위해 혼자만의 방 속으로 숨어들어 간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은 때로 도움이 된다. 나와 세상을 경계 짓는 벽을 깨트리고 나와, 아이에서 어른이 되기까지, 청춘의 시간은 숱한 도피적 경로로 가득 차 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본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기억할 것이다. ‘릴리 슈슈’라는 가수를 동경하며 인터넷 세계로 도피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감독 이와이 슌지는 슈게이징과 앰비언트 팝의 자장 아래 우울과 공명하는 ‘릴리 슈슈’의 음악을 시네마의 완성도 높은 한 요소로 선보였다. 그리고 최근 한국 인디 음악 신에서 슈게이징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준 홈 레코딩 뮤지션 파란노을의 상징적인 앨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커다란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쯤 되면 슈게이징이라는 장르가 우울과 도피로 가득 찬 정신세계를 가리키고 구축하는 음악이라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슈게이징(Shoegazing)’이라는 단어는 특이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1980~1990년대 영국에서 처음으로 이 장르를 선보인 뮤지션들은 관중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호흡하기는커녕,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신발(Shoe) 끝만 쳐다보며(Gaze)’ 서먹하게 기타를 연주했다. 그런 뮤지션들의 태도가 곧 장르의 이름이 됐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무대가 자기만의 방이었고, 뮤지션들은 그 속에서 혼자였다.
이들의 형식적 뿌리 역시 청중과 소통하기보다는 불화하는 쪽에 가까웠다. 1960년대 뉴욕의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이후 등장한 밴드 소닉 유스는 보통의 청중이 음악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든 소음들을 곡의 토대로 배치하고 때로는 포스트모던하게 곡의 구조 자체를 해체해가는 노이즈 록 실험을 벌였다. 슈게이즈는 노이즈 록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몰아치고 찢어지는 기타 소리를 만드는 퍼즈와 디스토션 이펙터, 그리고 기타 소리에 풍부한 잔향을 덧입히는 리버브 이펙터를 활용한 슈게이즈 기타리스트들은 소음에 가까운 신경질적인 소리의 벽을 쌓아간다. 밴드 음악 요소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들리지 않고, 근저를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배회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무뚝뚝한 몽환을 만들어내고, 분간하기 어렵게 뒤섞인 소리들은 청중을 바깥과 단절된 만화경의 세계 속으로 빠트리고 질식시킨다.
태도와 형식 모두 ‘스스로에 침잠하는 우울’을 향해 달려가는 이 장르는 1980년대 영미권 지하 인디 클럽에서부터 자신의 청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의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이 선보인 기타 노이즈나, 콕토 트윈스가 보여준 어둡고 짙은 분위기는 여러 후배 뮤지션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시간이 흐르자 펜더사의 재즈마스터 기타를 든 여러 밴드가 차고를 뛰쳐나와 슈게이징이라는 장르를 발명해내기에 이르렀다. 1991년 아일랜드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 선보인 2집 앨범 〈loveless〉는 하나의 기념비였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은 재즈마스터 기타의 플로팅 트레몰로 브리지와 암을 활용해 특유의 일렁이는 기타 소리를 연출했고, 디스토션과 리버브 그리고 오버 더빙을 통해 소리를 겹겹이 쌓아 거대한 소음의 벽을 만들어 청중을 압도했다. 영국에서도 슈게이징 밴드가 쏟아져 나왔다. 라이드가 1990년에 내놓은 〈Nowhere〉나 슬로우다이브가 3년 뒤에 발매한 〈Souvlaki〉가 인디 신에서의 유행을 이끌었고, 버브, 챕터하우스, 캐서린 휠, 러시, 스워브드라이버 같은 밴드가 쏟아져 나왔다. 다만 영국의 슈게이즈 밴드들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과 비교할 때 소음을 만드는 데 천착하기보다는 이를 적절히 활용하며, 달콤 씁쓸하고 꿈결 같은 분위기 그리고 부유하는 듯한 공감각적 공간을 연출하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영국 인디 신을 휩쓸었던 슈게이징 음악 유행은 금세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여러 슈게이징 뮤지션, 특히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기타리스트 케빈 실즈는 다양한 음향 장비를 활용하며 녹음 세션을 치밀하게 설계했고,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기약 없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는 큰 규모의 제작 비용을 필요로 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 인디 신의 작은 유행일 뿐이었던 슈게이징은 투자에 비해 큰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앨범을 제작하던 크리에이션 레코드는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결국 소니뮤직에 팔려버렸다. 그러나 슈게이징 유행이 사그라진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오아시스가 크리에이션 레코드를 통해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를 내놓으며 영국 밴드 음악의 헤게모니를 브릿팝 음악으로 완전히 가져와버린 것이었다. 너바나를 비롯한 미국 그런지 음악의 우울한 분위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낙관적 정서의 로큰롤 음악을 선보인 브릿팝 밴드들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됐고, 크리에이션 레코드를 비롯한 음반사들은 슈게이징 밴드 대신 브릿팝 밴드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많은 슈게이징 밴드가 이 시기에 해체하거나 브릿팝으로 전향했다. 가령 버브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Bitter Sweet Symphony’라는 브릿팝 히트곡으로 기억되고 있고, 라이드의 기타리스트 앤디 벨은 브릿팝을 하다가 오아시스에 베이시스트로 들어갔다.
이후 20년 가까이 대중음악 산업에서 자취를 감췄던 슈게이징은 근래에 이르러 밀레니얼과 젠지 세대를 대변하는 문화로 별안간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키노코 테이코쿠나 도쿄 슈게이저 같은 밴드들이 하나의 컬트적 현상이 됐고, 영미권 평단과 힙스터들 사이에서는 헤브 어 나이스 라이프나 얼웨이즈 같은 밴드들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슈게이징의 세 거장,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과 슬로우다이브 그리고 라이드는 재결성을 이루고 새로운 세대의 슈게이징 소비자들을 위한 명반을 만들었다. 심지어 슈게이징의 서정과 몽환으로 블랙 메탈을 재해석한 밴드 데프헤븐이 ‘블랙게이즈’라는 새로운 장르를 유행시키며 그래미 어워드 메탈 부문 후보로 지명되는 일까지 있었다.
한국 인디 신에도 비둘기 우유나 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프렌지 혹은 로로스처럼 훌륭한 슈게이징 음악을 만드는 밴드들이 과거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장르 자체가 하나의 화두가 된 것 같다. 여기에는 TRPP나 미역수염 같은 밴드들도 있지만, 파란노을과 델라 지르, 아시안 글로우와 브로큰티스, 혹은 오미일곱처럼 고독한 방에서 혼자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들의 공이 컸다. 단적으로 피아노 슈게이저는 기타와 밴드 악기 대신 랩톱 한 대를 들고 전자음악의 요소만을 활용해 슈게이징의 소리를 빚어간다.
1인 슈게이징 프로젝트의 존재는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을 통해 홈 레코딩으로 창작하는 것이 이전보다 수월해진 세태를 반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경향은 음악을 향유하는 이들은 물론 창작자들 역시 파편화된 사회와 무너진 공동체 속 고립된 청년 개인으로서 홀로 있음을 시사한다. 신발만 쳐다보는 이들의 음악, 슈게이징이라는 장르 자체의 내성적 성격과 더불어 파란노을의 가사들, 가령 ‘청춘반란’의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새끼/사회부적응 골방외톨이” 혹은 ‘변명’의 “다 컸다기에는 난 어린애였어/모두에게 나는 무엇으로 보일까/세상은 아름다워/나같은 놈도 먹고사니까” 등의 비관적 자조는 요컨대 고독과 무기력 그리고 사회적 주체되기의 실패가 시대정신이 됐음을 가리킨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홍대에서 ‘조선 펑크’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도 했던 펑크 운동은, 사회적 분노를 드러냄과 동시에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을 명확히 호명하곤 했다. 하지만 앞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언급했던 것처럼 ‘스스로로의 기약 없는 침잠’에 대해 읊조리는, 그리고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새끼”라는 가사에 공감하는 뮤지션들과 젊은 슈게이징 향유자들에게는 무언가를 탓하고 욕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 ‘주체성’이라는 말이 오로지 ‘물건을 살 때만’ 성립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주체됨’을 영영 경험해볼 수 없이 무기력한 밀레니얼과 Z세대에게 번아웃은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 현상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위 Z세대의 일원으로서 말하건대,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Writer 김로자(음악 비평가, 대중음악 웹진 〈온음〉 필진)
슬로우다이브(Slowdive), 〈Souvlaki〉(1993, Creation)
라이드(Ride), 〈Nowhere〉(1990, Creation)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and Mary Chain), 〈Psychocandy〉(1985, Blanco y Negro)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 〈Heaven or Las Vegas〉(1990, 4AD)
데프헤븐(Deafheaven), 〈Sunbather〉(2013, Deathwish)
웨더데이(Weatherday), 〈Come in〉(2019, Topshelf)
도쿄 슈게이저(東京酒吐座, Tokyo Shoegazer), 〈Crystallize〉(2011, 299 Japan Records)
헤브 어 나이스 라이프(Have a Nice Life), 〈Deathconsciousness〉(2008, Enemies List Home Recordings)
비둘기 우유, 〈Aero〉(2008, 일렉트릭 뮤즈)
TRPP, 〈Here to stay〉(2022,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아시안 글로우, 〈Cull Ficle〉(2021, Longinus Recordings)
브로큰티스, 〈추락은 천천히〉(2023, Longinus Recordings/포크라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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