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몰래 백설공주와 대화한 ‘몬드리안’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6. 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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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증자’를 사랑한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어떤 환자를 가장 사랑했을까? 바로 강박증자! 강박증자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프로이트는 쥐인간(예명)이 자기가 만난 가장 지적인 사람 중 하나라고 엄청난 찬사를 보내면서, 강박증을 정신분석의 미래를 위한 가장 풍부한 신경증이라고 설파했다. 현대정신분석가 드니스 라쇼 역시 강박증자가 ‘무시무시한 사유기계’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의 영원한 주인공들이라고 했다. 강박증이야말로 정신분석학자들에게는 해석해야 할 가장 좋은 텍스트였던 것일까.

프로이트가 강박증자를 가장 매혹적인 인간으로 바라본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가진 복잡성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없는 복잡성은 혐오스럽고 거부감을 주지만, 해독 불가능성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뿐 아니라 강박증자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잔인할 정도로 명석하게 자신에 대해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 관해서는 어떤 종류의 배려도 하지 않는 잔인한 존재들이다. 예컨대 강박증자는 지나치게 민감해 자신에 관해 숙고할 때도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고, 그만큼 다양한 체험을 한다. “바보들이 오류를 덜 범한다”는 라캉의 말과도 통한다.

강박증에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붙는 개념이 있는데, 바로 ‘반복’이다.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조형미술, 그중에서도 현대미술이야말로 ‘반복강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형의 최소 단위인 점-면-색만으로 이뤄진 추상미술이 그러한데, 이는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장르다. 그러기에 추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은 철학자들이며, 현대 미니멀리즘의 댄 플래빈과 도널드 저드 같은 작가들도 비평론을 쓴 이론가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문명과 정신의 폐허, 즉 아고니(agony)의 상태를 경험한 자들이다.

몹시 궁금해지는 것은 강박증을 시각화한 예술가들이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강박 증상을 보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의 선강박이나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즈처럼 우유와 큰 가슴을 가진 여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 있었을까? 물론 예술가는 편집증과 노이로제, 그리고 얼마간의 강박을 갖고 작업한다. 그렇지만 몬드리안만큼 실생활에서도 명확한 강박증적 면모를 보인 작가는 드물다. 그것이 혹 자기 예술의 홍보였을지라도.

네덜란드 Amersfort에 있는 생가에 재건된 Mondrian의 파리 아틀리에.
네덜란드 소도시 출신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년)은 빈곤이 만연하던 시대, 일상의 고달픔을 벗어나기 위해 종교적인 환상에 빠져 지내던 시절에 태어났다. 미술 교사로 시작해 초등학교 교장까지 지냈던 아버지 역시 칼뱅교 광신도였다. 아버지는 매우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한때 화가가 되기를 열망했을 만큼 내면에 어떤 열정 같은 것을 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저 아마추어 화가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부친은 교회에 대한 헌신과 종교적 망상에만 매달렸고, 집안일에는 도통 무관심했다. 가난을 면치 못했던 위태로운 가정 환경 속에서 겨우 8살이던 어린 누이가 살림을 맡아 할 정도로 어머니는 자주 아팠다. 경제난과 교육 부족, 그리고 절제되고 금욕주의적인 성장 배경 속에서 몬드리안은 점점 더 위축됐고, 점차 자기만의 상상의 세계로 퇴행했다.

좀 더 깊숙이 부모의 관계를 통해 몬드리안에게 내재화된 심리를 들여다보자.

우선, 믿음이 깨진 부모의 관계는 어린 그에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아마 병든 모친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배우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시했을 것이고, 몬드리안은 유년 시절 내내 어머니의 불신의 언어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남아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거울이자 참조점인데, 본받아야 할 아버지상이 부재한 것. 결과적으로 이 예민한 남자아이에게 “남자는 여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머니를 통해 습득한 이런 심리로부터 그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를 닮지 않는 것. 상징적으로나마 아버지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예컨대 파리에 정착한 서른 살이 돼서야 비로소, 물려받은 아버지의 이름 피테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을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으로 바꿨다. 이름뿐 아니라 Mondriaan을 Mondrian으로 성도 살짝 바꾼다.

앙드레 케르테츠가 찍은 몬드리안, 1926년.
몬드리안, 붉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 1908~1909년.
여성을 ‘미술’ 대척점으로 본 몬드리안

그런다고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와 죄의식이 단번에 와해될 수는 없다. 아버지를 버린 그는 큰 아버지를 세워야 했다. 정통 기독교에서 소외된 신지학(Theosophy)을 만난 것. 신지학이란, 보통의 신앙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해 알아가고자 하는 종교 철학이다. 신지학에 강력하게 매료됐다는 것은 실제의 아버지를 버리고 더 큰 아버지(great father)를 선택했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부성의 세계에 대한 몬드리안의 거부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애초부터 결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부성에 대한 불신은 어머니로부터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주입됐고, 자신이 아버지처럼 될까 봐 두려워했다. 1909년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던 해, 전통적인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용기를 갖고 약혼하지만 그 관계는 금세 끝난다. 1928년, 56세에 지인의 딸인 20살 어린 여성을 우연히 만나 교제했지만 여성의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은 좌절됐다. 몬드리안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초상화를 통해 얼마간 가늠할 수 있다. 몬드리안은 여성에 대해 어둡고, 어색하고, 경직된 태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몬드리안은 여성을 미술과 추상에 대항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마치 그가 유기적인 선을 싫어했고, 그리하여 자연과 초록을 극도로 혐오했듯.

몬드리안, 노랑, 파랑, 빨강의 구성, 캔버스에 오일, 59.5 x 59.5㎝, 1921년, Kunstmuseum Den Haag, 헤이그, 네덜란드.
몬드리안은 방을 작품 스타일에 맞춰 매우 엄격하고 간소하게 개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간을 삼원색과 무채색의 보드만으로 꾸미고, 전축은 빨강, 입구 장식용 조화의 초록 잎사귀는 흰색으로 칠해놨다. 그가 단 한 번 조화 대신 생화를 꽂았을 때는 앞서 말한 한 어린 여성을 사랑할 때였다. 어쨌거나 실생활에서도 강박증적으로 살았던 몬드리안은 밤에는 남몰래 백설공주와 대화했다. 그가 남긴 소장품 중 백설공주 세라믹 인형, 일곱 난쟁이와 동물들과 이야기하는 백설공주 포스터는 강박증자 몬드리안의 기이하지만 조화로운(?) 일상을 엿보게 한다.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2호 (2024.06.05~2024.06.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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