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남자와 썸 타고 키스…전도연, 뜨거운 이 남자 만난 순간
[비욘드 스테이지] 올해 연극계 최고 기대작 ‘벚꽃동산’
큰딸의 남자와 ‘썸’을 타다가 작은딸의 남자와 키스를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주어가 ‘전도연’이라면 왠지 납득이 간다.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가슴 깊숙이 묻고, 술과 약과 남자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며 처연하게 웃음짓는 그의 얼굴에 누가 침을 뱉을까.
‘27년만의 연극 출연’으로 호기심을 부채질했던 전도연의 ‘벚꽃동산’(7월 7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이 4일 베일을 벗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연출가라는 사이먼 스톤과 LG아트센터의 협업인지라 일찌감치 ‘올해 연극계 최고 기대작’으로 꼽혀왔다. 개막일엔 유인촌 문체부 장관을 비롯한 공연계 인사들,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석권한 유럽의 연출 거장 이보 반 호브까지 찾아올 만큼 국내외 관심이 쏠린 무대다. 이미 내년 호주 아들레이드 페스티벌 투어가 확정됐고, 유럽 투어도 타진 중이라고 한다.
‘핫한 연출가’ 사이먼 스톤·LG아트센터 협업
‘벚꽃동산’은 ‘리얼리즘 연극의 아버지’ 안톤 체홉(1860~1904)이 혁명 직전 불안한 기운이 가득하던 1904년의 러시아 사회를 초연하게 그린 작품으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과 변화에 영 적응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옥신각신하며 웃픈 장면들을 이어가는 희비극이다. 사이먼 스톤은 이걸 2024년의 한국인들 이야기로 싹 바꿨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지만 이런 고전의 파격적 변주는 사실 배우에 앞서 해석의 예술이다. 전도연과 영화 ‘너는 내 운명’(2005)을 함께 했던 배우 황정민도 같은 LG아트센터에서 연극 ‘맥베스’를 연습 중이라 개막일 관람했는데, 시작 전 기대감을 묻자 “체홉이 원래 재미없지 않냐”고 하더니 공연 후에는 “내가 알던 벚꽃동산과 전혀 달라서 너무 좋았다”고 했다. 이보 반 호브도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벚꽃동산’의 위대한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추켜세웠다.
호주 출신 영화 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사이먼 스톤은 온갖 고전을 머릿속에 아카이빙해 놓고 가는 곳마다 적절한 작품을 꺼내 맞춤형으로 각색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지난해 한국에 답사를 와서 직접 ‘벚꽃동산’을 선택했다고 한다. 세계적 연출가가 고전의 현재적이고 한국적인 변용을 시도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회의 현주소도 관전 포인트다. 스톤이 바라본 한국사회가 ‘벚꽃동산’인 셈인데, 원작이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억눌린 민중의 불만과 기득권층의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스톤은 뭐든 가장 빠르게 변화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 사회에 내재된 불안감을 간파한 것이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 이후 뉴욕으로 떠났던 재벌 3세 송도영(전도연)이 5년 만에 실연의 상처를 안고 그 사이 몰라보게 달라진 서울로 돌아온다. 상속받은 기업은 오빠 송재영(손상규)의 방만한 경영으로 파산 직전이다. 입양한 큰딸 강현숙(최희서)은 부사장이지만 힘이 없고, 엄마의 남성 편력에 신물 난 작은딸 해나(이지혜)는 해방을 꿈꾼다. 놀고먹는 사촌 김영호(유병훈)는 쓰러지는 송씨 집안에 돈을 꾸러 드나들고, 젊은 가정부는 운전기사와 비서 사이 인스턴트 연애에 몰두한다. 어린 시절 송도영을 동경하던 옛 운전기사의 아들 황두식(박해수)이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이 ‘아름다운 콩가루 집안’ 주변을 맴돈다.
K콘텐트 마니아라는 스톤은 영화 ‘기생충’의 세계관에 영향 받은 듯하다. 다른 버전의 ‘벚꽃동산’에서 흔히 오브제로 쓰이는 벚꽃나무 한 그루를 거대한 레고블록같은 집 한 채가 대신한다. ‘일본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이 저택은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이상향으로, 사람들은 시종 계단 모양의 지붕을 불안하게 오르내린다. “서구에서는 거의 사라진 건강하지 못한 위계질서와 관계성이 아직 존재하는 사회”. 스톤이 바라본 한국이다.
일견 전쟁 이후 부를 일군 특권층과 하부계층의 대립구도인 듯 하지만, ‘기생충’이 그랬듯 단순하지 않다. 죽은 아들의 과외선생 변동림(남윤호)의 대사가 스톤의 정치적 시선을 반영한다. “무력한 정부 아래 우리는 오로지 이윤만 좇는 기업에 충성하면서 봉건시대보다 불평등한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기에 혁명이 필요하다”. 혁명의 대상이 재벌 3세의 올드머니가 아니라 벼락부자의 불도저인 것이다.
봉준호 ‘기생충’ 연상시키는 세계관
전도연과 박해수는 복고와 혁신이라는 한국 사회의 충돌하는 가치를 충실히 대변한다. 원작의 몰락 귀족 류바는 ‘기생충’의 부잣집 사모님 최연교(조여정)처럼 우아를 떨지만, 송도영은 대놓고 딸의 남자에게 추파를 던질 정도로 훨씬 과감해졌다. 전도연의 어딘지 퇴폐적이고 특유의 나른한 태도는 답도 없이 나이브한 재벌 3세 송도영이라는 캐릭터에 더없이 찰떡인지라 대단한 연기 변신은 없지만, 존재감만으로 관객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파산은 아랑곳 않고 1954년산 턴테이블을 자랑하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되는 가치” 운운하는 오빠 송재영은 도영의 정서적 쌍둥이다. 황두식은 남매가 소중히 여기는 무형적 가치를 ‘고장난 벽시계’ 취급하며, 끝내 이들의 ‘동산’에 럭셔리 호텔을 짓기 위해 ‘아름답되 쓸모없음’의 상징인 벚꽃나무를 다 밀어버린다. 이 무대에서 오버스러운 무대 화술을 구사하는 건 박해수 뿐이다. 파산 위기에도 돈 문제에 초연한 송씨 남매에게 돈 얘기만 하는 벼락부자 황두식은 그저 우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박해수의 연극배우 출신다운 뜨거운 에너지가 자꾸만 차갑게 식으려는 무대의 온도를 끌어올려 준다.
어쩌면 이 혼자만 뜨거운 황두식이야말로 사이먼 스톤이 정의하는 한국인이 아닐까. 역사와 전통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고 고층의 상업시설을 부지런히 지어 올려도, 그런 한국을 송씨 남매처럼 나른하고 무심하게 바라보는 서구인들은 부러운 기색도 없다. 불도저를 쓸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 공허함을 이미 알고 있을 뿐.
“전부 다 부숴버려. 새로운 시대가 올 거야. 오늘이 시작이야”. 안전모를 쓰고 공사를 시작하는 황두식 뒤로, 귀를 찢는 EDM 전자음향이 막을 닫는다. 황두식의 새로운 시대, 아니 한국의 미래에 대한 경고음처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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