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 갈다 눈물 뚝뚝... 엄마가 돼서야 이해한 엄마
[김명주 기자]
▲ 마지막 생일 축하 메세지 엄마가 내게 손수 써주신 마지막 생일 축하 메세지 |
ⓒ 김명주 |
그때 정신도 없이 얼떨결에 눈물로 장례를 치른 뒤, 이제는 어른이 되겠다고 혼자서 다짐했었다. 낮에는 학생이고 저녁부터 밤까지는 입시학원 보조강사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가끔은 퇴근길이 무척 피곤하고 기운이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엄마가 해주시던 뽀얗고 진한 설렁탕이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 제법 이름난 전문점에 들어가 특대 사이즈를 주문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이자, 한 숟가락 크게 국물을 떠 마신다. 순간 뿌옇게 시야를 가린다.
설렁탕에서 올라온 김이 서린 것인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뜨끈할 때 빨리 잘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그 뽀얗고 진했던 '엄마표 설렁탕'도 이제는 세상에 없구나 싶다. 그동안 정신없이 공부와 일로 스스로를 몰아치면서,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음식을 통해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고, 또 음식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이의 이야기를 최근 읽었다. 2년 전 출간돼 이미 유명한 <H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mart)>, 미셸 자우너의 자전적 회고록이 그것이다.
▲ < H마트에서 울다 > 책표지 |
ⓒ 문학동네 |
책을 쓴 미셸, 한국계 미국인 저자는 서울 태생으로 생후 9개월쯤 미국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갔다. 한글학교에도 가고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방문, 친척들과 시간을 보내며 한국적 정서를 경험한다. 반면 학교에서는 유일한 한국인이 돼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엄마는 강박적으로 집을 깨끗이 관리하려 들고 저녁이면 피부 관리, 패션 등으로 자신을 가꿨다.
미셸은 자라 사춘기가 되면서, 여느 미국 엄마들과는 다르게 자기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엄마와 부딪힌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던 엄마였기에 저자는 크게 상처받는다. 딸은 일부러 집에서 먼 대학교로 진학한다. 대도시에서 자유로운 뮤지션으로 삶을 살고 싶었단다, 반항하듯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뜸해진다. 음악 하는 히피 친구들과 어울려, 이전과 전혀 다르게 살지만 그래도 엄마 모습은 자꾸 떠오른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별의 순간이 다가와서야 깨닫는 것이 인간이다. 어느 날 미셸은 엄마의 췌장암 소식을 듣는다. 서둘러 투병 생활을 도우려 고향집으로 향한다. 항암 치료하는 엄마를 위해 좋아할 만한 음식을 기억해 내고 만든다.
예전 짬뽕과 바삭한 전을 좋아하고 음식 만들어 나누는 것을 즐기던 엄마 얼굴을 떠올리지만, 지금 눈 앞에선 음식을 먹지 못하고 토해내는 현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직은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계속 되뇌면서 말이다.
어느날 그녀는 어릴 적 자신, 그러니까 엄마가 딸의 사진, 딸이 오래전 그린 그림, 학교에서 받은 상장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모아둔 것을 보면서 엄마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느끼고 눈물을 쏟는다.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고 보살필 준비가 되어 있던 엄마였다.
미셸은 엄마를 한 여자의 인생으로도 바라본다. 상처가 되었던 엄마의 말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며 밴 가치관과 습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낯선 미국 땅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인 아빠가 바람을 피웠던 기억, 엄마가 약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물컵도 없이 덜렁 약병만 가져오던 아빠의 모습도 기억한다.
▲ 엄마와 딸(자료사진). |
ⓒ 픽사베이 |
엄마 임종 전에 서둘러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 그리고 얼마 뒤 이별의 순간. 엄마 장례식 뒤, 한국에서 건너온 가족들에게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미셸은 그렇게 엄마의 딸로 서서 변해 버린 세상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셸은 혼자 H마트(한인마트)에 가서는 가족들이 자주 먹던 김 브랜드가 뭐였는지 몰라 습관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그 순간 이제는 물을 엄마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는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는 결코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픔 또한 끌어안는 것일뿐.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한낱 기록과 내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숙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돌고 도는 인생인지, 또 얼마나 달콤 쌉싸름한 일인지."- <H마트에서 울다> 중 (p.173, e북 버전)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이제야 제대로 추모합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나 또한 아이를 낳고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돌아가신 엄마를 제대로 추모하고 기억하기 시작했다.
아이 기저귀를 갈다가, 어릴 적 내 동생 똥 냄새도 구수하다며 웃으시던 엄마 얼굴 생각이 나서 눈물이 뚝, 아이들 운동회에서 학부모 달리기 하고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기억 속 엄마 모습과 내가 꼭 닮아서 눈물이 뚝. 도시락을 쌀 때면 매일 도시락과 같이 넣어주시던 엄마 쪽지와 손글씨가 생각나서 눈물이 뚝뚝. 이제야 운다.
<H마트에서 울다>에서 작가 미셸은 엄마가 해주시던 한국 음식을 통해 절절한 사모(思母)의 마음을 담는다. 글쓴이는 이 책을 통해 당신 삶을 열심히 살다가, 어느날 문득 엄마 생각이 나면 울어도 괜찮다고, 엄마는 기억 속 과거형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게 만드는 따뜻한 공감이고 위로라고 얘기해 주는 듯하다.
이 책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서 표현하기조차 꺼리던 내게, 이렇게 글로 엄마에 대한 감정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글을 쓰면서 드디어 엄마 생각에 푹 빠져볼 수 있었다. 작가 미셸의 말처럼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지나온 내 인생을 이해하는 오롯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부디 그런 선물같은 시간이 주어지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사이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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