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복합 상소 참여
[김삼웅 기자]
▲ 광화문(1902)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나던 당시와 가장 가까운 시점의 광화문. 이 모습으로 복원이 추진되었다. |
ⓒ 문화재청_보도자료 |
전제군주 시절에 일반 백성들도 군주를 향해 호소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 언로기능의 제도적 장치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상소제도였다. 일반적으로 상소는 승정원에 직접 제출하는 직정제(直呈制)와 지방관을 통하는 종현도상소(從縣道上疏)의 전달 방법이 있고, 제출된 상소는 반드시 회시할 책무가 있었다.
상소라고 해서 모두 문서로서 하는 것은 아니다. 통신방법으로 나누면 봉사(封事)·의(議)·서계(書啓)·장계(狀啓) 등 문서로 하는 것과 계언·진언 등 구두에 의한 방법, 복합·권당 등 직소에 의한 방법 등이 있다. 특히 봉사는 중간에 개봉할 수 없는 국왕 친전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었다.
500년 왕조에서 이러한 언로가 모두 완벽하게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폭군시대에는 폐쇄되거나 제한되고 성군시대에는 열렸다. 그래서 선비들은 언로대계를 주창하였다. 지치주의를 내걸고 개혁정치를 도모하다가 38세에 사화의 희생물이 된 조광조는 "언로의 통색(通塞)이 국가에 가장 중요하다. 언로가 통하면 치안(治安)하지만 막히면 난망한다"고 설파하였다.
동학지도자들은 억울하게 참형된 교주 최제우의 해원과 동학의 공인을 받고자 시도하였다. 1892년 10월 20일 충청도 공주에 1천여 명의 동학도가 모여 서인주·서병학 등 8명의 장두가 교조의 신원과 동학의 공인, 동학도의 재산침탈 중지, 외국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의송단자를 관찰사 조병식에게 보내었다. 조병식은 동학의 공인문제는 조정의 권한임을 들어 회피하였다. 다만 동학도의 재산침탈 행위는 방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동학도들은 5일 만에 철수했다.
공주의 교조신원운동에 춘암이 참가하였는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청도에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에 춘암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1893년 1월의 서울 광화문 복합 상소의 핵심인물로 동참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은 교단을 11월 1일 삼례에서 다시 모여 전라감영에 의송단자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강경책을 쓴 전라감사 이경직은 동학도의 위세에 눌려 11월 11일 각 군현에 감결을 내려 보내 동학도의 재산 약탈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양호(兩湖)의 두 관찰사가 동학의 금지는 조정의 일이라고 말하자 교단에서는 한양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주석 1)
삼례집회는 손천민을 상소의 대표자로 삼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두 가지를 청원하였다.
하나는 유교는 공자의 유학이 아닌 종교로 인정하고, 탄압이 심하던 천주교, 야소교(예수교)도 인정하면서 동학만 배격탄압하는가, 둘째는 서리와 포졸들이 선량한 도인들을 탄압·살상하는 비인도성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교조의 신원과 교단의 자유를 거듭 요구하였다. 조병식과 이경직은 동학의 공인은 정부가 결정할 일이나 부당한 탄압은 없애겠다고 약속하였다. 지도부는 이 약속을 믿고 평화리에 군중을 해산시켰다.
삼례집회는 정부가 '교조신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 선비·유생들이 '이단'으로 몰아치는 상소가 잇따랐지만, 이제껏 지하에 묻혀 있던 동학 자체로서는 큰 성과를 거둔 행사가 되었다.
단순한 신원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삼례의 모임은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성패에 관계없이 중요한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하여 동학운동사상 최초의 '정치 집회'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이다. 종교는 대중의 정치집단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삼례의 신원운동은 동학의 그와 같은 정치집단화 과정의 서막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석 2)
동학 내부에는 낡은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후천개벽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중을 동원해서라도 창도정신을 실천해야 한다는 급진파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먼저 교조신원을 관철하고 합법적인 신앙생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비폭력 온건파로 갈렸다.
전자는 서인주·서병학의 계열이고 후자는 최시형을 비롯하여 김연국·손천민 등이다. 최시형은 우선 교단의 전통을 보전하면서 힘을 길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동학을 무시한 채 이단시하는 정부의 태도에서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최시형과 동학지도부는 1883년 3월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적인 집회를 통해 교조신원을 직접 정부에 건의하는 복합 상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부가 이 무렵 왕세자 탄신일을 맞아 별시(別試)를 치르도록하여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상경할 것에 착안한 것이다. 동학간부들도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처럼 차림하고 서울로 오도록 하였다.
상경한 동학교도 수 천명은 서울(한성) 인근에 머물고 춘암 등 50여 명이 3월 28일 오전부터 광화문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리기로 했다. 춘암의 사촌동생 박광호(朴光浩)를 소두 곧 우두머리로 세울 만큼, 그는 이 행사를 주도하였다. 서울의 3월 하순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 추운 계절이다. 상소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도(吾道)는 동에서 받아 동에서 펴는지라. 어찌 가히 서로써 이름 하리오. 하니 이가 동학으로써 득명(得名)한 바요 신등(臣等)이 종사한 바니 두렵건대 동학을 가리켜 서학으로써 공격하지 말고, 동포를 몰아 이단으로 배격하지 않는 것이 가하거늘 도신수재(道臣守宰)는 민초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고 향간토호는 도인 대하기를 화천(貨泉)과 같이 하여… 이 도는…과시(果是) 만세에 무폐(無弊)하고 천하에 무극(无極)의 잘못에 범함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 부모는 화육중(化育中) 적자(赤子)를 극휼(亟恤)하여 써 선사(先師)의 지원(至冤)을 풀게 하며 신등 사명(死命)을 건져 주소서. (주석 3)
최시형의 뜻에 따라 손병희와 박광호·순천민·박인호 등이 대표가 되어 올린 상소는 지극히 온건한 내용이고 방법도 관행처럼 돼 있는 복합상소인데도 조정은 여전히 이단시하고 배척하였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왕실의 관리가 나타나 고종의 전교를 전했다.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업에 임하라. 그러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 주리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교도들이 이를 믿고 해산하자 조정은 약속과는 달리 동학을 더욱 거세게 탄압했다. 상경했던 교도들은 귀가할 수가 없었다. 관헌들이 체포하려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끝내 동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동학의 교세가 급성장한데 위기감을 느낀 유생들이 이번 상소의 소두 발광호를 처형하라는 상소를 계기로 고종이 체포 명령을 내렸다. 춘암을 비롯 동학 도인들은 분노하여 새로운 대책을 서둘렀다.
주석
1> 성강현, 앞의 책, 53쪽.
2> 앞의 책, 130~131쪽.
3> 오지영, <동학사>, 78~80쪽(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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