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 내시'의 진짜 모습, 거액 준 사람 알고보니...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6. 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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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고종 옆에서 항일 운동 전개한 강석호

[김종성 기자]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아관파천은 세계적 사건이었다. 영국·독일 등이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견제하던 상황에서 조선의 '식물 임금'이 아라사로 불리던 이 나라의 공관에 들어가 국제정세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건이다.

아관파천은 이범진을 비롯한 친러시아파, 알렉세이 스페이예르 주한러시아공사를 비롯한 러시아 세력, 내시 강석호를 비롯한 친왕세력 등의 합작품이다. 이 일은 일본과 친일파의 감시하에 경복궁에 갇힌 고종을 아라사공사관으로 옮겨 일본의 입김을 줄이고 러시아의 위상을 높였다.

그날 새벽 고종이 여성용 가마를 타고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을 빠져나감에 따라 일본은 순식간에 영향력을 대거 상실했다. 아직은 일본이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이식하지 못하고 조선의 기존 시스템에 의존하던 시기라서 고종의 신변 이동이 정세 변화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동학혁명 중인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뒤이어 청일전쟁 승리와 동학군 진압에 힘입어 조선을 단독 장악한 일본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와 타협을 하게 됐다. 양국은 1896년 5월 14일의 웨베르-고무라 각서, 동월 26일의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통해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영향력 행사를 약속했다. 이렇게 생겨난 러·일 세력균형은 러시아가 조선문제에서 한발 물러서는 1898년까지 이어졌다.

러시아는 1897년 11월 14일에 산둥반도 자오저우만을 점령해 자국의 남진에 지장을 준 독일을 견제하고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확실히 해둘 목적으로 1898년 4월 25일 일본과 로젠-니시 협정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물러났다. 아관파천으로 인한 세력균형은 이때 종료됐다.

아관파천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단독 장악하지 못하고 러시아와 세력균형을 유지한 기간은 2년이다. 이렇게 보면 아관파천이 일제 강점을 2년 정도 늦춘 셈이 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기간은 더 늘어난다.

일본은 1896년부터 2년간 공동 영향력을 행사한 러시아와 1904년에 전쟁을 벌여 1905년에 승리를 확정지으면서 한국에서 러시아의 흔적을 지웠다. 그런 뒤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행했다. 이렇게 보면 아관파천으로 인해 강점이 지연된 기간은 9년으로도 볼 수 있다. 2년이든 9년이든 아관파천이 일제의 침략에 상당한 제동을 건 것은 확실하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강석호
 
 서울 정동에 위치한 옛 러시아공사관. 1896년 고종 황제가 잠시 피신했던 `아관파천' 장소이기도 하다. 2009.1.6
ⓒ 연합뉴스
이처럼 아관파천이 항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도 이 사건의 핵심 주역인 내시 강석호는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훈사업이 항일운동의 실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2008년에 <사학 연구> 제89호에 실린 장희흥 대구대 교수의 논문 '대한제국기 내시 강석호의 활동'에 소개된 강석호 묘비에 따르면,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에 묻혀 있는 강석호는 철종 임금 때인 1858년에 태어났다. 관직에 진출한 것은 17세 때인 1875년이다.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실권을 행사한 지 얼마 뒤의 일이다.

38세 때의 아관파천에서 공을 세운 일은 그가 고종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됐다. 을사늑약 2개월 보름 뒤인 1906년 2월 1일에 업무를 개시한 한국통감부의 문서를 수록한 <통감부 문서>는 강석호를 "유명한 내관"으로 소개하면서 "황상이 이전에 노국(露國)공사관으로 파천할 때 배종했다"라며 "상당한 총애가 있었다"고 말한다.

강석호는 친미파였다. 그는 고종과 친미세력을 중개했다.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의 <이완용 평전>은 고종이 "자신의 시종이면서 미국통이었던 강석호를 시켜 친미 정치세력과 연락을 도모"했다고 설명한다. 러시아와 미국은 같은 편이 아니었지만 1896년 당시의 조선에서는 친러파와 친미파가 명확히 갈리지 않았다. 이런 친미노선을 배경으로 강석호의 항일·반일이 전개됐다.

고종은 아관파천 12년 전인 1884년에도 러시아를 한반도에 전격적으로 끌어들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과 서방세계가 러시아의 남진을 집중 마크하는 속에서 그해 7월 7일(음력 윤5.15) 러시아와 수교해 영국 진영에 충격을 줬다. 이 때문에 놀란 영국이 이듬해 3월 1일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거문도를 점령한 일은 고종이 얼마나 대담한 일을 벌였는가를 보여준다.

고종이 김옥균·김관선 등을 내세워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은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882년에 민중반란인 임오군란을 진압하려고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이 군대의 내정간섭에 시달린 고종은 1884년에는 청나라를 견제할 의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의 본질은 친러가 아니라 반청이었다.

마찬가지로 아관파천의 본질도 친러가 아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을 진압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덩달아 들어온 일본군에 당한 고종이 일본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벌인 반일·항일이었다. 고종이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를 막는 일종의 돌려막기를 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어쩌다 일본의 표적이 되었나
 
 서울 수유리 근현대사기념관에 게시된 헤이그특사 모습. 사진 속 좌측이 이준 열사. 가운데가 이상설, 우측이 이위종.
ⓒ 김종훈
 
이때 고종의 뜻을 성사시키며 일본의 기세를 꺾는 데 기여한 강석호는 그 뒤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에 나섰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고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는 이준 열사에게 여비 10만 원을 건넨 이가 강석호다. 1949년 5월 19일 자 <연합신문> 기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충청북도 조사부, 친일파 박두영 검거'는 구한말에 박두영이 강석호의 재산을 탐낸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우리 민족사에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 이준 열사의 헤이그 파견 시 당시 내시로 있던 강석호 씨가 금 10만 원을 여비로 주었다는 사실을 탐지한 박두영은 강씨를 위협·공갈하여 그 재산을 전부 횡취한 사실이 있어 지금 강씨의 자제로부터 당시 횡령당한 재산의 반환 요구도 있다 하며"

<조선상고사> 저자인 독립운동가 신채호가 1905년에 <황성신문>에 입사할 당시의 논설위원 월급이 30원에서 40원 정도였다. 강석호가 이준에게 건넨 10만 원은 <황성신문> 논설위원 2500~3000명의 1개월 월급이었다.

고종에게서 10만 원이 나왔을 수도 있지만, 강석호의 재산을 탐내는 박두영의 모습을 보면 일단은 강석호 수중에서 돈이 나왔을 수도 있다. 훗날 강석호의 기부 활동이 언론에 자주 보도된 것을 감안하면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러 가는 밀사에게 누구 돈이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10만 원을 줬다는 것은 강석호의 항일 의지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강석호가 활동한 시기는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약산 김원봉을 연상시키는 항일투쟁에도 가담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불리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한 배정자를 제거하는 일에도 나섰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 외교권을 노리던 1905년에 있었던 일이다.

1949년 2월 간행된 친일 분야의 대표적 문헌인 <민족정기의 심판>은 "이봉래·강석호 씨 등은 암암리에 이 매국녀의 암살 계획을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관계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고 기술한다. 강석호는 이 외에도 박영효·유길준 암살 계획도 준비했다.

이런 활동들은 강석호가 일본의 표적이 되는 원인이 됐다. 구한말 상황을 다룬 황현의 <매천야록>은 을사늑약 이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내시 강석호가 달아났다"라며 "왜인들이 수색했으나 잡지 못했다"고 말한다.

강석호의 존재는 대한제국보다 내시제도가 먼저 사라지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일본이 만국평화회의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킨 뒤인 1907년 11월 7일에 내시제도가 폐지된 것은 강석호 같은 인물들을 한국 황제 주변에서 몰아내기 위한 일본의 의중과도 무관치 않았다.

강석호는 고종이라는 인물과 내시제라는 제도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이 둘이 1907년에 일시적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는 정치적 기반을 잃고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가게 됐다. 그 뒤 그는 경기도 용인에서 말년을 보내며 각종 기부 활동으로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그는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는 않지만 고종 임금 주변에서 전개된 항일 활동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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