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공연, 한국 관객 사랑이 원동력”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로 첫 작업
“이방인의 외로움 정서 작품에 담겨”
국내 뮤지컬계에서 ‘윌휴’ 콤비로 불리는 박천휴(41) 작가와 윌 애런슨(43) 작곡가는 손대는 작품마다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 지난해 말 개막한 윌휴 콤비의 신작 ‘일 테노레’는 쏟아지는 호평 속에 올 상반기 연장 공연까지 이뤄졌다. 의사이자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인 테너 이인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된 ‘일 테노레’는 윌휴 콤비의 트레이드마크인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아름다운 선율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일 테노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오는 18일~9월 8일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윌휴 콤비의 대표작 ‘어쩌면 해피엔딩’이 공연된다. 특히 ‘어쩌면 해피엔딩’의 미국 버전이 뉴욕 브로드웨이의 1000석 규모 대극장 ‘벨라스코 씨어터’에서 오는 9월 프리뷰를 거쳐 10월 본공연이 개막 예정이다. 국내 소극장에서 시작된 창작 뮤지컬이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는 점에서 한국 뮤지컬사를 새로 쓰게 됐다. ‘어쩌면 해피엔딩’ 서울 공연을 앞두고 내한한 윌휴 콤비를 최근 대학로에서 만났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저희가 원작 없이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든 첫 작품입니다. 내밀한 사랑이야기를 써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는데요.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과 중국 라이선스 공연에 이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게 돼 창작자로서 기쁩니다.”(박천휴, 윌 애런슨)
‘어쩌면 해피엔딩’은 21세기 후반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을 느끼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근미래 배경의 로봇이라는 소재와 아날로그 감성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천휴가 좋아하는 영국 록밴드 ‘블러’ 보컬인 데이먼 알반의 솔로곡 ‘에브리데이 로봇’(Everyday Robots)에서 영감을 받았다. ‘에브리데이 로봇’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로봇에 비유한 노래로 외로움의 정서를 담고 있다. 2014년 우란문화재단의 기획으로 개발된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5년 우란문화재단 낭독 공연과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2016년 말 서울에서 초연이 이뤄졌다.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제2회 한국뮤지컬어워즈 6관왕을 차지했다.
“초연 당시만 해도 대학로에서 남녀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 환영받지 못했던 터라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큰 사랑을 받았고, 올해 5번째 시즌까지 이뤄지게 됐어요.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공연은 한국 관객의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해요.”(박천휴)
“미국과 달리 한국은 더블 또는 트리플 캐스팅으로 공연하기 때문에 배우마다 각기 다른 매력을 볼 수 있어요. 이번에 새로 참여하는 배우들도 각자의 해석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작품에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윌 애런슨)
윌휴 콤비는 ‘어쩌면 해피엔딩’ 대본을 쓸 때부터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을 동시에 작업했다. 영어 버전은 2016년 뉴욕에서 열린 관계자 대상 낭독 공연에서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드의 관심을 끌었다. 리처드는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을 8회나 받은 거물이다. 윌휴 콤비는 당초 오프 브로드웨이(100~499석 극장) 공연을 예상했으나 리처드가 브로드웨이(500석 이상 극장)를 제안했다. 지난 2020년 애틀란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한 ‘어쩌면 해피엔딩’은 코로나19 팬데믹을 만나 잠시 미뤄졌다가 올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됐다. 연출은 지난해 ‘퍼레이드’로 토니상 최우수 연출상을 받은 마이클 아덴이 맡았다. 한국 버전은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 외에 멀티롤(Multirole, 많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까지 3인극이지만 브로드웨이 버전은 멀티롤을 분리한 것이 다르다.
“브로드웨이 공연이라고 하면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배우의 숫자가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트렌드를 보면 규모보다는 작품의 다양성이 중시되고 있어요. 저희 역시 작품이 지닌 정서를 해치면서까지 규모를 키우고 싶지 않았습니다.”(박천휴)
“브로드웨이 공연을 위해 완전히 작품을 바꿔야 한다면 저희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저희가 처음부터 의도한 ‘어쩌면 해피엔딩’의 정서를 살리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그리고 요즘 관객들은 스케일이 큰 뮤지컬의 ‘클리셰(상투적 표현)’를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고 내밀한 작품을 보고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요.”(윌 애런슨)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공연은 한국 공연과 연출적 차이는 있지만, 등장인물과 이야기는 그대로다. 서울과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거나 극 중 올리버의 옛 주인이 한국인인 것 등도 원작대로 미국 무대에 올라간다. 다만 한국 공연에서는 제주도를 갈 때 해저터널로 간다면 미국에서는 페리로 간다는 설정이 바뀐다. 박천휴는 “한국 배경의 이야기를 미국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고 말했다.
윌휴 콤비는 2008년 뉴욕대에서 만나 친구가 된 이후 함께 어울리며 취미 삼아 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애런슨은 하버드대 학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한 후 뉴욕대 대학원에서 뮤지컬 작곡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박천휴는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가요 작사가로 짧게 활동하다가 현대미술을 공부하러 뉴욕대로 유학 왔다.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2008년)로 한국 제작사 ㈜뮤지컬해븐과 먼저 인연을 맺은 애런슨이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를 제안받았을 때 작사가로 박천휴를 추천한 것이 콤비 작업의 시작이다.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8년 뉴욕 워크숍을 시작으로 2010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시범공연에 이어 2012년 서울에서 초연이 이뤄졌다. 초연 당시 호평받은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후 2013년, 2018년 재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 이어 윌휴 콤비가 무대에 올린 작품이 바로 ‘어쩌면 해피엔딩’이다.
“저희는 취향이 비슷한 친구로서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창작 파트너가 됐어요. 천휴는 소설,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야기의 영감을 받습니다. 덕분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예술적 영향이 큽니다. 작업 과정에서도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토론과 조율을 통해 최선을 찾습니다.”(일 애런슨)
“뉴욕에 사는 한국 작가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작곡가가 협업하다 보니 저희 작품은 양쪽 문화가 섞여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외로움의 정서가 기본적으로 작품에 녹아있는 것 같아요.”(박천휴)
윌휴 콤비는 올해 12월 신작 ‘고스트 베이커리’를 들고 다시 관객을 찾아올 예정이다. 197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최고의 양과자점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순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윌휴 콤비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 역시 한국이 배경이다.
“저희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왕과 나’ 같은 작품을 올리고 싶어요.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왕과 나’는 아시아 배우들이 가장 많이 출연할 수 있거든요. 저희 작품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보편적 정서를 다루는 만큼 서양 관객에게도 충분히 다가갈 수 있다고 봐요. 이번 ‘어쩌면 해피엔딩’을 시작으로 다른 작품들도 브로드웨이에 올라가는 꿈을 꿉니다.”(박천휴)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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