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웃기는 인생] 인생은 시냇물과 같다

2024. 6. 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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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아내와 내가 당분간 충남 보령으로 생활공간을 옮긴다고 말하면 “갑자기 웬 보령?”이라는 질문이 쏟아진다. 이어서 ‘거기가 고향이냐’ ‘연고자가 있느냐’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한다. 저 고향 싫어하고요, 되도록 연고자 없는 곳에서 사는 게 꿈이었어요.

그러면서 나는 왜 하필 보령에서 살기로 했을까 진지하게 되물어본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고 이제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니까 서울과 가까운 지방에 내려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내 직업인 글쓰기 강연이나 책 쓰기 워크숍 등은 온라인으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면 강의가 더 좋으니 기차로 두 시간 정도면 서울에 닿는 곳이 좋겠다. 주말엔 친구들 만나고 연극도 봐야 하니 서울에도 작은 숙소를 마련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보령이란 곳이 아내의 레이더망에 들어왔다. 아내는 당장 보령시 홈페이지를 뒤져 ‘보령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찾아내고 서류를 작성했다(미적거리는 나와 달리 아내는 실행이 빠르다). 며칠 뒤 담당 공무원이 연락해왔다. ‘축하합니다. 2024년 보령 한 달 살기 사업에 선정됐음을 알려드립니다.’ 보령에서 한 달을 살게 된 것이다. 뭐 잘됐네,라고 무심히 말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경쟁률이 꽤 높았다고 한다.

보령 하면 생각나는 게 뭘까? 대부분 ‘머드축제’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너무 단편적이지 않나 하는 반성이 들어 공부를 좀 했다. 우선 놀란 게 보령에 가려면 대천역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령과 대천이 그렇게 가까운가 하며 찾아보니 둘은 같은 곳이었다! 보령시 안에 대천동이 있다. 보령시는 머드축제 말고도 다양한 산업과 관광지가 조화를 이루는 지역으로 수목원이나 해저터널, 석탄박물관 같은 관광 명소가 있었다. 대천은 백사장이 넓은 대천해수욕장으로 유명했다.

아내와 내가 보령 한 달 살기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보령 출신 페친께서 보령시 대외협력과장을 소개해줬다. 그를 만나 보령이 석탄산업을 벗어나 그린에너지 도시를 지향하는 곳이며 생활인구보다 관광객이 많아 ‘포용도시’ 면모도 갖추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고기잡이 나갔던 어부들의 허기를 달래주려 아내들이 항구에서 굴을 굽다가 대한민국 굴구이·조개구이의 원조 소릴 듣게 됐음을 알게 된 것도 의외의 수확이었다.

보령 한 달 살기의 거점으로 작은 호텔을 선택했다. 주최 측이 주는 숙박료보다 살짝 비쌌지만 조용하고 깨끗했다. 새벽에 책과 노트를 들고 로비로 내려와 혼자 놀면서 글도 쓰고 하니 헤밍웨이나 사르트르가 된 것 같은 허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어느 도시를 가든 서점이나 도서관을 먼저 찾아본다. 숙소 가까이 ‘보령도서관’이 있고 ‘보령시립도서관’도 가까웠다. 이웃한 홍성의 ‘충남도서관’은 놀랄 만큼 크고 시설이 좋았다. 오서산 깊은 곳의 ‘미옥서원’도 가보았고 추리소설을 주로 파는 서점 겸 카페 ‘검은고양이’에도 다녀왔다. 바다와 산과 도시를 모두 누릴 수 있는 보령은 알면 알수록 문화 도시였다.

대천해수욕장에서 열리는 <슈퍼어싱 해변맨발걷기> 대회에도 참가했다. 맨발로 해변을 걷는다는 컨셉이 단순하면서도 신선했다. 고작 1.5㎞를 왕복하는 행사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닐 사이먼의 연극 중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이나 ‘맨발로 공원을’ 같은 작품을 보던 20대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사람들은 맨발로 파도가 찰랑거리는 해안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크게 웃었다. 문득 ‘지구상 모든 동물 중 인간만 무좀에 걸린다’는 명제가 생각났다. 신발을 신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해서라고 했다.

비 오는 아침 산책길에 아욱국백반으로 유명한 인정식당을 찾았다. 밥과 국은 물론 머윗대와 계란말이도 맛있었다. 내가 1만8000원을 이체하고 스마트폰을 보여드리자 사장님은 안 봐도 된다며 웃었다. 그래서 600만원을 보내야 하는데 600원을 보냈던 예전 실수담을 말씀드리니, 손님 중 한 분이 자기도 예전에 200만원을 보내야 하는데 200원을 보낸 적이 있다며 웃었다. 웃음이 넘치는 식당이었다.

나는 뭔가 열심히 도모하는데 인생은 어깃장을 놓기 일쑤다. 그래도 큰 낭패보다 어이없는 웃음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 코너의 제목을 ‘진지하게 웃기는 인생’으로 했다. 보령에서의 삶이 진지할지 웃길지는 아직 모르겠다. 인생은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시냇물 같으니까. 보령아, 잘해보자. 일단 나를 좀 환영해 보령.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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