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인의 ’애국심‘은 어떤 것일까?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5>]
말레이반도 남쪽 끝 적도 아래(북위 1도) 있는 싱가포르섬에는 일찍부터 ‘테마세크’ 또는 ‘싱가푸라’라 불린 꽤 활발한 항구도시가 있었으나 17세기 초(1613?) 포르투갈인에게 파괴된 후 2백 년간 한적한 곳으로 남아있었다.
서울보다 조금 큰 면적의 이 섬에 영국동인도회사의 항구 건설이 시작되던 1819년경 인구는 1천 명 선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6백만 명 가까이 살고 있다. 그중 싱가포르공화국 시민권자는 360만여 명이고, 230만여 명은 영주권자를 포함한 외국인이다.
2020년 인구조사에 주민의 74.3%가 중국계, 13.5%가 말레이계, 9.0%가 인도계로 등록되었다. 종교는 불교 31.1%, 기독교 18.9%, 이슬람 15.6%, 도교 8.8%, 힌두교 5.0%로 나타났다. 대표공용어 영어 외에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출생도 국적도 싱가포르가 아닌 원로 역사학자
싱가포르를 ‘도시국가’라고 하는데, ‘국가’라기보다 하나의 ‘미아(迷兒)도시’ 같은 인상을 받는다. 싱가포르 ‘국민’이 보는 ‘국가’는 어떤 것일까? 많은 생각을 일으켜주는 책 하나가 최근 나왔다. 왕궁우의 〈여러 문명과 함께 Living with Civilisations〉(2023).
싱가포르의 원로 역사학자 왕궁우(王賡武, 1930~ )는 그곳 출생도 아니다. 자바섬에서 태어났고 소년기-청년기를 싱가포르와 그 부근에서 지냈으나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1965) 후 싱가포르를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와 홍콩에서 ‘화교(華僑)’ 현상을 연구했다.
S R 네이선 기념강좌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1999-2011년 싱가포르 대통령을 지낸 네이선(1924-2016)은 인도(타밀)계로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며 왕궁우와 좌익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사람이었다. 네이선 기념강좌는 정치 분야를 다루는 것이 관례인데 왕궁우의 초청에는 이 인연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네이선이나 왕궁우나 학생 시절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생각했겠지만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독립은 생각했을 것 같지 않다. 리콴유(1923-2015)도 “말레이시아 안의 싱가포르”를 지향하다가 쫓겨나듯 독립해야 했다. 그 후 네이선은 싱가포르의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역할을 찾았고, 왕궁우는 다른 곳으로 가서 화교 연구에 전념했다.
왕궁우가 1996년 홍콩대학을 정년퇴직하고 싱가포르국립대 석좌교수로 부임한 후 30년이 되어간다. 초년에 싱가포르에서 지낸 것보다 더 긴 기간이다. 그가 싱가포르를 “내 나라”로 보는 시각에는 일생을 통해 상당한 굴곡이 있었을 것 같다. 〈여러 문명과 함께〉에는 그 굴곡을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문명 동거의 현장을 덮친 ‘계몽문명’
이 책에는 싱가포르만의 역사가 아니라 동남아 전체의 역사가 해설되어 있다. 한 국가로서 싱가포르의 의미가 지역사의 맥락 속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지역사의 맥락은 ‘문명’과 ‘문화’로 구성되는 좌표계 위에서 풀이된다. 문명과 문화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명쾌하다. 문명은 울타리를 넘어서는 움직임이고 문화는 울타리를 쌓는 움직임이다. 울타리를 넘어서는 힘은 “더 좋은 것”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고, 따라서 문명은 진보를 지향한다. 반면 문화는 확보된 “내 것”을 지키는 보수의 자세로 나타난다.
동남아 주민들이 오랫동안 함께 해온 문명의 흐름으로 중국계, 인도계(힌두교와 불교), 지중해계(이슬람과 기독교)의 세 갈래를 짚는다. 문명에는 임자가 따로 없다. 받아들이면 내 것이 된다.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고유한 형태가 곧 문화다. 문명을 발원시킨 곳이 아니라 해서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지장이 없다. 불교가 발원지에서 쇠퇴했으나 동남아에서 화려한 문화를 피워낸 사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근대문명’을 “계몽문명(enlightenment civilisation)”이란 이름으로 부르며 문명의 새로운 갈래로 본다. 유럽의 계몽주의를 통해 발생했지만 종교적 신앙을 벗어나 자본주의 등 세속적 가치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문명과 별개의 흐름을 이뤘다는 것이다.
계몽문명의 흐름 속에 동남아가 특별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여러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조화와 균형을 이뤄 온 경험 속에서 새로운 문명 양상에 적응하는 지혜와 역량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 적응에 앞장서 온 것이 싱가포르라고 한다.
저자의 문명관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
저자가 제시하는 문명과 문화의 대립적 성격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문명과 문화가 같은 평면 위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명에도 문화에도 개방적 측면과 폐쇄적 측면이 엇갈려 나타날 수 있으며, 개방적이라 하여 문명이라고, 폐쇄적이라 하여 문화라고 이름 붙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명이 본질적으로 진보를 지향한다는 저자의 관점에 나는 반대의 생각을 가졌다. 문명의 사명은 변화에 절제를 가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사회의 기본 변화는 문명 차원 아닌 조건에 의해 추동되고, 변화에 따르는 파괴와 고통을 줄이는 방어장치로 문명이 형성된다. 변화가 급격할 때 문명 발전이 빠른 것은 방어장치의 필요가 크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이 방어장치가 변화를 지속시키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만, 작동의 기본 원리는 약자의 보호에 있다.
이 관점의 차이가 ‘근대문명’의 의미를 다르게 만든다. 왕 교수는 “계몽문명”이란 표현대로 근대문명을 전통의 구속에서 풀려난 ‘신문명’으로 본다. 나는 근대문명을 ‘문명의 공백’으로 본다. 기존 문명의 효능이 퇴화한 상황에서 새로운 문명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런 차이의 원인이 공간의 차이에도(한국에서 보느냐, 싱가포르에서 보느냐) 있겠지만 시간의 차이가 더 앞서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등 지속가능성 문제에 관한 걱정이 나보다 20년 연상인 왕 교수에게 덜 심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명’이라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일관된 태도를 포함한다. 전통문명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의 눈에 유치하게 (또는 불합리하게) 보이더라도, 어느 정도 지속가능성을 갖춘 태도이기 때문에 전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근대문명’보다는 더 문명다운 문명이 자라날 것을 나는 희망한다.
사회 중층화에 앞서간 남양
문명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절대적 정답이 없다. (‘세상’의 의미나 마찬가지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유효한 해석을 찾아내려 애쓸 뿐이다. 왕궁우가 나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면, 그 해석이 나온 위치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싶다. 그의 위치와 내 위치를 비교해서 두 위치가 겹치는 측면을 찾는 것이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길이다.
싱가포르는 2백여 년 역사 중 대부분 기간을 영국 식민지로 지냈다.(1819-1963)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는 대영제국의 핵심 항구로서 역할을 잃어버리면서 말레이시아의 항구로 새 역할을 찾는 것이 당연한 길로 보였다. 그래서 1963년 9월 말레이시아연방에 가입했으나 2년이 안 되어 축출되고 싱가포르공화국이 출범했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의회에서 싱가포르를 제외하는 개헌안이 한 표의 반대도 없이 가결되었다.)
말레이시아가 그 정중앙에 있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까닭은 무엇보다 종족 문제에 있었다. 싱가포르 외의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 인구비율은 23%가량이지만 그 문화적-경제적 역량은 인구비율보다 훨씬 더 컸다. 이런 구조 속에 중국계 비율 74%인 싱가포르가 최대 도시로 참여하는 것은 말레이 민족주의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년 시절에 겪은 독립 과정에 대한 저자의 당시 입장은 책에 보이지 않는다. 신생 공화국에 대한 특별한 애착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게라칸당(Gerakan, 중국계가 주축이지만 포용성을 추구하는 정당) 창당에 적극 참여했고 몇 해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그곳 국적을 취득했다.
이 강연은 싱가포르인에게 “내 나라”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고취한다. 맹목적 애국심일 수는 없다. 그 국가의 구조가 중층적이고 화자 자신의 정체성도 중층적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중층성도 화자의 중층성도 동남아 지역 전체 중층성의 부분들이다.
싱가포르 사람이 아니고 동남아 사람이 아닌 우리도 중층성을 체화하는 저자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도 중층성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이 변화에서 남양인이 선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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