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이예지 2024. 6.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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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프렌치 뉴요커, 이은지 셰프가 걸어온 길

이은지 Owner Chef of Lysée

‘코리안 프렌치 뉴요커’, 리제의 오너 셰프 이은지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이다. 10대 때 프랑스로 제과 유학을 떠나 뉴욕 맨해튼에 자신만의 디저트 숍 리제를 오픈하기까지, 그녀가 걸어온 모든 첫 번째 길에 대하여.

Q : 리제는 ‘코리안 프렌치 뉴요커’라는 이은지 셰프의 아이덴티티가 그대로 드러난 공간이에요. 맨해튼의 플랫아이언에 한국 고택의 자재를 옮겨 모던하면서도 한국적인 공간을 만들었고, 거기서 한국 식재료가 접목된 프렌치 디저트를 팔고 있죠.

A : 뉴욕이라는 세계적인 도시에서 한국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개 벽, 포천석, 한옥 기둥도 넣어서 디자인했죠. 그냥 봤을 때엔 한국적인 요소인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설명해주면 다들 흥미로워하더라고요. 그게 제 방식이에요. 제가 만드는 디저트부터 공간, 태도까지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걸 좋아하죠. 미술관을 가면 다양한 공간과 그림을 본 후 마지막에 기념품 숍에 들르듯 1층에 다이닝 공간을, 2층에 디저트를 구매할 수 있는 숍 공간을 만들었는데, 사실 많은 사람이 반대했어요. 동선이 어렵다는 이유였죠. 보통 1층에서 구매하고 2층으로 올라가 앉아서 먹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무도 하지 않은 거라면 우리가 첫 번째가 될 수 있고, 유니크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국, 프랑스, 뉴욕에서 얻은 경험과 아이디어가 차곡차곡 쌓여 코리안 프렌치 뉴요커라는 제 정체성과 일치하는 ‘리제’라는 공간이 탄생했습니다.

Q : 중학교 시절, 페이스트리 셰프가 되기로 결심한 뒤 부모님을 설득해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국립제과제빵학교(INBP)에 입학했어요. 왜 제과에 매료됐나요?

A :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림 그리기, 찰흙 빚기, 종이접기 등등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재미있었죠. 그러다 베이킹에도 관심이 생겨 쿠키를 만들어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맛볼 때의 표정이 큰 기쁨이더라고요. 그러다 페이스트리 셰프의 하루를 담은 방송을 TV에서 우연히 봤는데, 예술 작품 같은 케이크를 만들어내고, 눈으로 입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손님들의 표정을 봤을 때 눈이 반짝반짝해졌어요. ‘이거다!’ 하고요. 아직 ‘파티시에’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시절, ‘나는 꼭 파티시에가 될 거야’라고 결심했어요.

Q : 왜 프랑스였나요? 어떻게 그 어린 시절 해외로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었어요?

A : 고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제과제빵 강국인 프랑스와 일본 두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는데, 한 유학 박람회에 프랑스 제과제빵학교가 온다는 정보를 친구에게서 듣고 찾아가봤고, INBP를 알게 됐어요. 이왕 갈 거면 디저트,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에 가서 배우자고 결심했고, 유학 박람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서점에 가서 프랑스어 회화 책과 제과제빵 전문용어 책을 구매해 열심히 공부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Q : 막상 프랑스에 첫발을 내딛으니 어떻던가요?

A : 인천공항에서 헤어질 때 부모님은 우셨지만 저는 너무나도 행복하게 떠났어요.(웃음) 제 꿈에 다가가는 첫 발걸음이었으니까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설레네요. 학교 생활은 모든 게 다 신기했어요. MP3로 수업을 녹음해 숙소에 와서 다시 들으면서 공부하고 모르는 부분은 다음 날 선생님께 여쭤보며 예습도 매일 해 갔죠. 매 실습 시간이 행복했어요. 학우들이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 저를 딸처럼 예뻐해줬고 주말마다 집에 초대해서 그들의 어린 자녀들과 놀게 해줬어요. 덕분에 언어도 금방 늘었죠. 첫 시작을 좋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프랑스에 올 때 집안 사정이 여유롭지는 않아 학비와 소정의 생활비만 지원받았고, 인턴십을 시작했을 때부터는 부모님께 손을 벌린 적이 없었네요.

Q : 졸업 후 미슐랭 3스타인 ‘르 뫼리스’에서 4년간 근무하며 조리장 자리까지 올라갔죠. 파리 레스토랑의 군기나 업무 강도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아시안 여성 셰프로서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분명 차별도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 무려 ‘전쟁 기계’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A : 하하. 프랑스에선 일을 빨리 정확하게 잘하는 사람을 좋은 의미에서 ‘기계’라고 표현해요. 저는 말 그대로 손이 빠르고 정확한 편이라 그런 별명을 붙여주셨어요. 저와 수셰프 2명이 30명 넘는 페이스트리팀을 이끌었는데, 그 많은 사람을 이끌려면 군기가 필요해요. 제가 실질적으로 팀을 이끄는 역할을 했는데, 아시안 여성 셰프로서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팀원들, 총괄 셰프, 수셰프 모두 저를 믿어줘서 책임감 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루 기본 16~18시간 일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셌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 잘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 2017년, 프랑스의 TV 서바이벌 프로그램 〈다음엔 누가 위대한 파티시에가 될 것인가〉 시즌 4에서 한국인 셰프로 준우승을 차지했어요. 비유럽인 셰프가 파이널에 오른 건 전 시즌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죠. 이때의 경험은 어땠나요?

A : 너무나도 소중하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죠! 첫 동양인 참가자라는 것에 책임감도 느꼈지만, 부담을 갖기보단 제가 하고자 하는 걸 해보려 했어요. 제가 워낙 다양한 식재료를 써서 심사위원 셰프님들이 반신반의했지만, 저는 제가 맛보이고 싶었던 걸 일단 한번 드셔보시라는 마음으로 했죠.(웃음) 한 미션에서는 동양인 참가자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어 호롱불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1위를 했어요. 리제 시그너처 디저트인 옥수수 케이크를 처음 선보였던 것도 이 대회의 파이널 때였는데, 심사위원들은 대체 왜 옥수수를 쓰냐며 걱정했지만 정작 맛보고는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며 정말 뿌듯했어요. 사실 ‘내가 과연 잘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는데, 격려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Q : 르 뫼리스의 수셰프 자리를 고사하고 뉴욕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정식당’의 총괄 페이스트리 셰프로 갔죠. 이 결정은 어떤 이유로 내린 것이었나요?

A : 두 제안을 비슷한 시기에 받았는데, 정말 고민이 컸어요. 둘 다 너무나 좋은 제안이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프랑스에서 10년 넘게 있었고, 새로운 도전과 모험이 필요했던 시기였어요. 뉴욕에서의 도전은 분명 매력적인 요소였죠. 하지만 뉴욕행을 택한 이유는 새로운 도전과 모험에 앞서, 정식당이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정식당의 팬이었거든요. 정식당은 한식을 기반으로 다양한 식재료와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곳이니, 제가 프랑스에서 익힌 기술로 한국적 재료와 문화를 녹여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펼쳐 보일 수 있겠다 생각했고, 뉴욕은 다양성의 도시인 만큼 잘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Q :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며 언어도 바뀌고, 생활 환경과 업무 환경도 바뀌었을 텐데 뉴욕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요.

A : 10년 넘게 지내온 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와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적응력이 좋은 편이라 금방 될 줄 알았는데 책임감이 큰 자리다 보니 부담감도 있었고, 아는 사람이 없는 데다 언어와 환경도 다른 낯선 도시였으니까요. 하지만 만날 사람도 없으니 집과 직장만 오가면서 오히려 디저트에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식당 주방에만 박혀 지내느라 집에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을 정도였죠. 나름의 외로움과 힘듦을 털어내는 방식이었는데, 그 시간이 오히려 저를 더 성장할 수 있게 해줬어요.

Q : 그렇게 일궈낸 기반을 바탕으로 ‘리제(Lysée)’를 론칭했습니다. 성씨와 박물관을 결합한 흥미로운 네이밍인데,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A : 제 성인 ‘Lee’와 프랑스어로 미술관이라는 뜻인 ‘Musée’로 ‘Lee’s sweet gallery’를 만든 거죠. 제가 어릴 적 페이스트리 셰프를 꿈꿨을 때부터 그려왔던 콘셉트예요. ‘Edible Art’, 먹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눈으로 입으로 향유할 수 있게끔 하는 직업이 페이스트리 셰프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저만의 공간을 만드는 날이 온다면 그것을 강조해서 보여줄 수 있는 디저트 갤러리를 만들고 싶었죠.

Q : 볶은 현미, 메밀, 흑임자 같은 한국적인 식재료와 접목한 프렌치 디저트를 만들죠. 기와 문양의 시그너처 무스 케이크 ‘리제’도 한국의 멋이 있고요.

A : 사실 저는 어릴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많이 몰랐어요. 오히려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공부하며 노트해뒀고, 그 기록을 조금씩 펼쳐 보이기 시작한 게 뉴욕이었죠. 그것이 다양성의 도시 뉴욕과 맞았던 것 같고요. 저는 늘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해요. 수정과, 메밀, 대추, 오미자 등 한글도 그대로 메뉴판에 표기하고, 낯설지 않은 사과 타르트에 오미자나 유자 등을 넣는 식으로 은은하게 섞어놓죠. 먼저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한 뒤, 설명이나 깨달음이 뒤따라오도록요.

Q : 베이비 바나나, 옥수수 같은 메뉴는 정말 인스타그래머블한 메뉴라고 생각했습니다. SNS에 포스팅하기 좋은 팬시한 메뉴의 개발 역시 트렌드의 중심 뉴욕 한가운데서 디저트를 만드는 셰프로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겠죠?

A : 팬시한 걸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는 않아요. 다만 디저트는 눈으로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첫눈에 ‘우와!’ 할 수 있는 비주얼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Q : 제과업계는 요식업계에 비해 비교적 여성 셰프가 많지만, 그럼에도 아시아 여성에게 호의적인 환경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대나무 천장, 유리 천장을 맞닥뜨린 적이 있는지,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 궁금합니다.

A : 사람들의 생각을 제가 일일이 바꿀 순 없으니 열심히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와 노력, 실력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제일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 역시 그렇게 해왔고요. 열심히 하고 잘하는 모습이 계속 노출되고 보여야, 그러한 천장이 조금씩이라도 허물어지지 않을까요? 지금도 그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Q : 앞으로 쭉 뉴욕에 정착해 살면서 사업을 확장해나갈 계획인가요?

A : 제 정체성인 리제가 뉴욕뿐 아니라 파리, 서울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지금은 아직 오픈한 지 2년 밖에 안 됐고 리제에서 할 일이 많아 확장을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좋은 타이밍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안 될 건 없죠. 천천히 생각해보려 해요.

Q :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갑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야심이 향할 곳은?

A : 하하. 저도 천국에 가고 싶은걸요?(웃음) 일단은 리제라는 공간이 뉴욕에 좀 더 단단하게 자리 잡는 게 목표예요. 뉴욕에 가면 꼭 방문해야 할 특별한 곳으로 손꼽히도록요. 다양한 국가의 여러 도시에서 좋은 제안을 받고 있어서, 이를 통해 리제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게 제 목표입니다.

Q : 한국을 떠나 커리어를 펼치고 싶은 여성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준다면요?

A :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고, 이 일은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일이기에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정말 당신이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을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찾을 수 있다거나 해외에서 펼치는 게 더 좋은 상황이라면, 나오세요.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열정과 어떤 의외의 상황에 부딪혀도 돌파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 그리고 신체 건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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