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이 무너진다 [기자수첩]

신대현 2024. 6. 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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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100일 넘게 전공의 이탈이 이어지며 발생한 의료현장의 혼란을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쓴 단어다. ‘하얀거탑’들을 지탱하던 전공의들이 사라지니 위태롭게 흔들리는 의료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잠깐이면 돌아올 거라 여겼던 전공의들은 복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병원은 전공의가 없어지자 진료를 축소했다. 신규 환자도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학병원이 비상경영에 들어갔고, 직원들은 무급휴직에 내몰렸다. 치료받지 못한 환자와 그 가족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격무에 시달리며 이들이 떠난 빈자리를 지키는 선배 의사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며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만으로 의료현장의 혼란이 극심해지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전공의에 의존하는 기형적 의료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교육생 신분으로서 수련교육에 매진해야 할 전공의가 진찰, 처치, 수술, 당직까지 다양한 의료 행위를 도맡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단 지적이다. 대한민국 최고 의료기관이라는 서울대병원은 전공의가 전체 의사 중 46.2%를 차지한다.

정부는 전공의 공백을 메우겠다고 진료지원(PA) 간호사, 공중보건 의사, 군의관, 시니어 의사, 개원의에 이어 외국인 의사도 투입했다. 인력과 함께 막대한 재정도 들어갔다. 비상진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난 3월 이후 4개월간 정부가 투입한 재정은 총 1조63억원이다. 건강보험 재정 지원(8003억원)이 네 차례, 예비비(2060억원) 투입은 두 차례 이뤄졌다. 국민 혈세를 하루 100억원 꼴로 전공의들이 떠난 빈자리에 쏟아붓고 있는 셈이다. 재정 지원은 7월10일까지 이어진다. 의료현장 혼란이 장기화되면 지원 기간은 더 연장될 수 있다.

인력과 재정을 투입한 의료현장의 사정은 나아졌을까. 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오히려 극심해졌다. 수도권 대형병원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지역의료 공백이 커졌다. 인구가 적고 고령자가 대부분인 도서 산간 지역은 병원이 많지 않아 공보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데 이들이 계속 차출되고 있다. 대안으로 비대면 진료가 한시적으로 허용됐지만 ‘땜질 대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보건소와 보건지소에선 지역의료를 강화하겠단 정부의 약속과 달리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한탄도 나온다.

시범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병원을 등진 의사들을 대신하게 된 간호사들은 불법과 합법 사이 모호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며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환자 처치를 어디까지 해야 하나’, ‘혹시 잘못되면 책임져야 하진 않을까’라는 생각들이 맴돌며 매 순간이 고민의 연속이다. 지난 2020년 전공의 파업 당시 간호사들은 대체 인력으로 나섰다가 ‘무면허 의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의사들에게 고발당한 바 있다.

매일 수십억원의 손해를 보는 병원들의 경영난은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 지방 병원부터 도산이 시작돼 그 여파가 전국으로 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력 수급은 오래 전 구멍이 났다. 전공의들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수련 일수를 채울 수 없게 되고, 전문의 자격 취득 시기가 지연돼 내년에 전문의 2800명가량이 배출되지 못한다. 전문의 배출 시점이 뒤로 밀리면 군의관, 공중보건의 확보에도 지장이 생긴다.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증원되더라도 의대 신입생이 전문의가 되려면 10년 이상 걸린다.

의료공백 사태가 어떤 결론으로 끝나든 의료현장이 예전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긴 쉽지 않을 것이란 게 공통된 견해다. 설령 전공의들이 복귀하더라도 이들이 다시 필수의료과를 선택할지 장담할 수 없다. “더 이상 환자를 볼 자신이 없다”며 실의에 빠진 의사도 있다. 의정 갈등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의사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증오는 터질 지경이다. 간호사 등 다른 의료계 직역 간 반목은 더 심화될 조짐이다. 환자들은 치료받지 못해 병세가 나빠질 수 있단 불안감 속에서 의사를 향한 원망을 키운다. 이 모든 일들이 단 넉 달 만에 벌어졌다.

요즘 정부의 의료공백 대책을 보고 있노라면 블록 하나를 빼내어 맨 위층에 쌓는 게임인 ‘젠가’가 떠오른다. 환자의 눈물과 의료진의 땀으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거탑은 전공의라는 블록이 빠지자 우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탑을 세우려면 갖은 노력과 많은 시간, 인내가 필요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땜질식 대처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진정 의료체계를 견고히 하고자 한다면 정부와 의료계 모두 한 발자국 물러서서 머리를 맞대고 의료개혁을 위한 ‘백년대계’를 논해야 한다. 누가 맞고 틀린지,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가 왜 중요한가. 국민이 더 이상 피해 입지 않도록, 환자 곁에 남은 의료진이 스러지지 않도록 양쪽 모두 벼랑 끝 투쟁을 이제는 멈출 때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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