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 바꾸는 '21세기 다빈치' "전염병 같은 아파트 지루하다" [더 인터뷰]
'건축 전공 안 한 건축가' 헤더윅
요즘 세계 주요 도시에서 손꼽는 랜드마크마다 이 남자의 이름이 붙어 있다. 토마스 헤더윅(54). 영국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고, 헤더윅 스튜디오의 대표다.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의 치열한 경연장인 뉴욕 맨해튼도 헤더윅의 놀이터가 됐다. 2019년 완공되자마자 ‘맨해튼의 에펠탑’으로 입소문 난 조형물 ‘베슬(The Vessle)’, 2021년 5월 개장해 한 달 만에 50만 명이 몰려든 허드슨 강의 인공섬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가 그의 작품이다. “최근 10년간 뉴욕에서 새로운 장소를 만든 이로 헤더윅을 손꼽는다”(정현태 뉴욕공과대 건축대학 교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건축계의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르니 러브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현재 맨해튼에서만 5개의 프로젝트가 헤더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랜드마크를 짓고 싶은 세계 주요 도시에서 프로젝트가 줄 잇는다. 지난달 28일 서울시에서 개최한 노들섬 국제설계공모전에서 헤더윅의 작품 ‘소리풍경(SoundScape)’이 당선됐다.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재건축도 그가 맡았다. 가덕도 신공항 국제설계공모전에도 출사표를 던졌다.
헤더윅은 ‘메시아’로 부상했지만, ‘이단아’라는 평가도 받는다. 지난해 10월 발간한 저서 『휴머나이즈(Hunmanise)』에서 현대 건축의 거장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전 세계 도시에 지루한 건물이 전염병처럼 퍼지게 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연히 세계 건축계에 큰 파장이 일었다. 지난 4일 이래저래 뜨거운 헤더윅을 서울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인기 스타의 등장은 의외로 단출했다. 오전 8시 45분, 남산 자락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하기로 해서 20분 일찍 갔는데, 헤더윅은 더 일찍 와 있었다. 그것도 혼자였다. 숙소인 잠실 롯데타워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인터뷰를 끝낸 뒤에도 다음 미팅 장소로 혼자 택시를 타고 갔다. 팀과 그곳에서 합류한다고 했다.
이른 아침에 인터뷰를 잡아야 할 만큼 초 단위 스케줄이긴 했다. 그는 “내일(5일) 중국으로 출국해서 여러 도시를 돌았다가 본사가 있는 영국을 찍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간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 설계한 구글 신사옥에 이어 또 다른 테크 기업의 의뢰가 있단다. 한국에 잠깐 머무를 때도 기업 오너가와의 미팅이 줄 잇는다고 하니, 건설 경기불황도 그를 비껴가는 듯했다.
그의 인기 비결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영국 디자인을 혁신한 공로로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인테리어 디자인계의 거장, 고 테레스 콘란 경(1931~2020)이 그를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칭했고, 이 별칭은 그의 이름 앞에 호(號)처럼 따라붙는다. 좀 더 거창한 별칭으로 ‘건축의 메시아’도 있다.
건축계 메시아, 헤더윅
헤더윅은 계보 없는 건축가다. 건축을 공부하지 않았다. 영국 맨체스터 폴리테크닉에서 3차원(3D) 디자인을 공부했고, 영국 최고의 디자인 학교로 꼽히는 왕립예술대학(RCA)에서 가구 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졸업과 동시에 헤더윅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건축가ㆍ디자이너ㆍ엔지니어 등 각 분야 전문가 250명이 일하고 있다.
Q : 24살 때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A : “건축ㆍ디자인ㆍ조각 등 여러 분야를 두루 다루고 싶었는데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과감히 내 껄 시작하자 싶었다. 끔찍하게 두렵긴 했다. 매주 런던으로 가서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잠자면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다가 테레스 콘란 경을 만났고, 그의 집에서 머물며 첫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다.”
Q : 콘란 경의 영향이 컸다.
A :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옳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나 건축가들은 ‘세상이 왜 이걸 원하지’라고 묻지 않는다. ‘색이 안 맞는 것 같아’ ‘각을 살려야 할 것 같아’라는 말만 한다. 콘란 경은 소비자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며 디자이너가 소비자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Q : 작업과정은 어떤가.
A : “우리는 드로잉을 먼저 하지 않는다. 먼저 조사를 한다. 프로젝트의 맥락과 장소를 이해하고,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 찾는다. 대표인 내가 스케치해서 팀에 던지며 ‘해봐’라는 식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팀 안에서 함께 대화하고 실험하면서 아이디어를 가꿔 나간다. 가장 어린 막내의 의견도 꼭 듣는다.”
헤더윅이 왜 인터뷰 장소에 혼자 왔는지 선뜻 이해됐다. 그러니까 소위 ‘대표님을 모시는’ 분위기가 없었다. 헤더윅은 2010년께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을 통해서다. 다른 국가관과 달리 건물을 작게, 바깥 휴식공간을 크게 만들었다. 피로한 관객들을 먼저 생각한 결과다.
영국관은 별다른 전시 없이, 씨앗이 담긴 6만개의 플라스틱 투명 막대를 네모난 건물 전체에 촘촘히 꽂았다. 밤송이 같은 건물, 관중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이 형태에 열광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자를 보유한 영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그해 미국 타임지는 최고의 발명품으로 엑스포 영국관을 꼽았다. 미국 실리콘밸리 ‘구글 신사옥’, 일본 도쿄 ‘아자부다이힐스’, 상하이 푸둥지구의 대규모 복합 주거단지 ‘1000 트리즈(trees)’ 전 세계 도시에서 랜드마크 프로젝트가 줄 이었다.
건축계의 이단아, 헤더윅
헤더윅은 최근 “인간적인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라며 관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영국 러프버러 대학교에서 이 캠페인과 연계해 2025년부터 석사 학위 과정을 만들 예정이다. “가르침에 지배받아 똑같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직감을 키우며 과학적인 사고도 키울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주창하는 ‘인간적인 건물‘을 둘러싼 논란도 만만치 않다.
특히 그는 『휴머나이즈(Humanise)』에서 현대 건축의 거장들 때문에 지루한 건물, 비인간적인 건물이 만들어졌다고 저격했다. 그러니까 아파트 창시자인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미국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에, ‘마천루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을 모두 지루한 건물을 만들게 한 원흉으로 깠다. 건축계의 성역을 건드린 셈이다. 이 계보 없는 건축가는 이단아로 등극했다.
헤더윅은 “2차 대전 이후 건축이 효율성에만 중점을 두다 보니 감성적인 부분이 소외됐고, 장인정신도 거부하면서 무조건 크면 좋다는 식으로 발전했다”고 지적했다. 대중의 취향과 동떨어진, 건축가들만의 리그가 이어져왔다는 주장이다. 그는 또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영혼 없는, 효율성만 따지는 건물들이 우후죽순 지어졌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가 철학으로 내세운 ‘인간적인 건축’의 논거는 아직 단단하지 못한 듯 했다. 감성적이고, 눈길을 끄는 건축이라고 하는데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가디언은 이를 두고서 “유치원생 수준의 담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헤더윅은 내년에 서울에서 열리는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선정됐다. 비엔날레 주제는 역시 ‘휴머나이즈’다. 그의 인간적인 건축을 향한 탐구는 서울에서 보다 진전된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노들섬, 성공할까
헤더윅의 작업에선 비싼 건축비가 늘 화제다. 다채로운 소재를 섬세하게 다루며 디테일을 살리는 헤더윅의 건축은 비쌀 수 밖에 없다. 뉴욕의 에펠탑이라 불리는 ‘베슬’은 이탈리아 장인의 손길을 거쳐 맨해튼으로 배달됐는데, 제작비가 약 2억 달러(당시 환율로 2300억원)였다. 헤더윅은 반박했다.
“GDP 대비 건설업으로 지출되는 비용이 크지 않다. 사회는 부유해지는데 건물은 점점 싸게 지으려고 한다. 경제성만 따지지 말고, 인간적인 건물을 짓기 위해 좀 더 지출할 필요가 있다.”
서울 노들섬도 1차로 아이디어안의 건축비가 2조 가까이 든다는 추산이 나와 논란이 됐다. 당선된 최종안은 아이디어안보다 규모를 축소해 3000억 원대의 예산에 맞췄다. 한국의 산 모양을 형상화한 공중보행교를 노들섬 위에 설치해 한강대교로 쪼개진 섬을 잇는다는 구상이다. 공모전에 참가한 국내외 7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화려한 이미지였다. 헤더윅은 “한강의 큰 규모를 고려해 좀 더 욕심내고 싶었고, 더 많은 사람이 노들섬에 모이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다소 아쉬움도 있다. 노들섬 ‘사운드풍경’에서 기시감이 느껴져서다. 뉴욕 맨해튼 인공섬 ‘리틀 아일랜드’와 중국 상하이 복합쇼핑센터 ‘1000트리즈’에서 반복되는 콘크리트 나무화분을 스틸로 바꿔 노들섬에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를 지적하자, 헤더윅은 “동일한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각 프로젝트의 과정을 설명했다.
노들섬은 내년 2월 착공해 2027년 완공될 예정이다. 이대로 잘 지어진다면 서울 시민들은 3년 뒤 현대 건축계의 메시아(혹은 이단아)가 탄생시킨 새로운 랜드마크를 감상할 수 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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