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 불려가 피아노 친 엄마…딸인 날 엄마라 불렀다"
엄마가 딸이 됐다. 피아니스트 이경미 경남대 교수의 이야기다. 흔히 '치매'라 부르는 인지저하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 오이숙 씨는 이 교수를 "엄마"라고 부른다. "맛있는 것도, 예쁜 옷도 사주니까 엄마잖아"라면서다. 그럼 이 교수는 "우리 이숙이는 어쩜 이리 고울까"라고 답한다고. 이렇게 되기까진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이 교수 본인도 유방암 투병을 했다.
다행히 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도 터득했다. 그간 최근 펴낸 신간, 『엄마의 자장가』엔 그의 인지저하증 어머니 간병 15년의 지혜가 담겼다.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그는 "치매가 곧 죽는 병인 줄 아시는 분들이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책을 썼다"며 "나도 첫 5년은 머리로만 이 병을 이해하려 했는데, 결국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억력은 사라져도 감정은 살아있다"며 "치킨을 먹을 땐 (맛있는) 다리를 주고, 소파에 앉아도 항상 센터에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챙기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엄마가 자신을 엄마라고 불렀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내가 왜 엄마야?"라고 부드럽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맛있는 거 주고, 예쁜 옷과 모자 사주니까 엄마지"라는 답이 돌아왔고, 이 교수도 "맞네, 그럼 우리 바꾸자, 재미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서운한 일도 물론 있었다. 그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을 때 얘기다. 이 교수는 "어머니가 유방암 얘기를 들으시더니 당신이 걸렸다는 말씀으로 오해하시고 '안 돼, 난 더 살아야 해'라며 우시더라"며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섭섭했다"고 회고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틀렸다. 이 교수와 남동생인 안과의 이도형 씨가 그 증거다. 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한 지붕 아래 15년째 간병을 해왔다. 이 교수는 "어머니가 백세 되시는 앞으로 10년도 즐겁게 보살펴 드릴 것"이라며 "남동생도 나도 결혼을 안 했으니 이렇게 가까이 돌볼 수 있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남동생이 장보기에 요리까지 헌신한다며 고마워했다.
이 교수에게 어머니는 등대였다. 평양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김일성 앞에 불려가 피아노 연주를 했을 정도로 천재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6ㆍ25 발발 후 이남행을 택한 어머니는 이화여대를 나왔고, 네 딸에게 "강해져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언니ㆍ동생들과 남자아이들을 때려서 학교에 불려가도 어머니는 우릴 혼내지 않았다"며 "여장부를 키워낸 여장부"고 말했다.
피아노와의 인연도 어머니 덕에 생겼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가르친 것도 어머니였고, 홀로 미국 유학을 가서 전설적 지휘자인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 역시 어머니 덕에 친해졌다. 이 교수는 "오자와 선생님이 어머니가 싸주신 갈비를 우연히 드시고 한식의 팬이 됐다"며 "저의 보호자 역할을 평생 해주셨다"고 전했다. 지난 2월 식도암 투병 끝 작고한 오자와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눈시울은 붉었다. 그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 초빙교수로도 활약하고 2005년 외국인 최초로 러시아 문인아카데미 최고예술상을 거머쥐는 데는 어머니와 오자와 선생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다.
스승은 작고했지만, 이 교수는 어머니에게 여전히 피아노를 쳐 드린다. 즐겨 연주하는 프레데릭 쇼팽의 곡들은 지난 4일 KBS '아침마당' 생방송 자리에서도 연주했다. 이 교수는 "엄마라는 딸이 생겼으니 앞으로 10년, 아니 그 이상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거예요"라며 "환자와 간병 가족 모두 희망을 잃지 않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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