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길 백범이 눈물 흘리며 참배…숨은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 [백성호의 현문우답]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다. 석 달 뒤인 11월 23일 백범 김구와 김규식 등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1진이 귀국했다. 12월 1일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등 임정 요인 2진이 귀국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에서 임정 요인들은 무슨 일을 먼저 했을까.
귀국한 지 열흘쯤 됐을 때였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 30여 명은 12월 12일 서울 종로의 대각사를 찾았다. 해방 조국에서 급히 인사를 해야 할 인물이 있었다. 5년 전에 입적한 백용성(1864~1940) 스님이었다. 김구는 이시영ㆍ조소앙ㆍ이범석ㆍ유림ㆍ황학수ㆍ김창숙 등과 함께 대각사 부처님께 예배한 뒤 용성 스님의 영전에 참배했다.
당시 김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용성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시어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를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중국 상하이로 보내주시어 만대 위국충절 순국으로 독립운동의 사표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아울러 용성 스님이 쌀가마에 돈을 넣어 만주로 보내주어 요긴하게 썼다는 일화도 꺼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은 꽤 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과 함께 서둘러 용성 스님의 영전부터 찾았다. 여기에는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백용성의 생애’가 숨어 있다. 용성 스님의 손상좌인 도문 스님(89, 조계종 원로의원)은 온갖 자료와 함께 스승(동헌 스님)과 집안 어른들에게서 직접 들은 ‘스승의 스승(용성 스님)’이 남긴 독립운동의 족적을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침 올해는 백용성 스님의 탄신 160주년이다. 탄생일인 오는 6월 13일(음력 5월 8일)에는 전북 장수의 죽림정사(용성 스님 생가터)에서 용성 스님의 유훈을 따르는 ‘대한민국 800년 대운을 여는 만인대법회’가 열린다.
#수운 최제우와 혜월 스님의 인연
구한말은 격동기였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전북 남원 교룡산성의 불교 암자에 숨어서 동학사상을 정리한 포덕문(布德文)과 논학문(論學文)을 썼다. 암자의 이름은 용천사 덕밀암(德密庵). 당시 덕밀암에는 용천사 조실인 혜월 스님이 있었다. 혜월이 머무는 조실채의 이름은 ‘은적당(隱蹟堂)’. 지금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은적당을 최제우 대신사의 피신 성지로 꼽는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백용성 스님이 14세 때 불교에 귀의한 곳이 바로 덕밀암이다. 용성의 스승은 혜월 스님이었다. 훗날 혜월은 수운을 숨겨주고, 함께 개벽의 문호를 열었다는 이유로 승적이 박탈된다. 수운과 혜월의 동지적 인연은 나중에 각자의 손자뻘인 손병희(천도교 3대 교주)와 용성 스님의 항일 연대로 이어진다. 돌아보면 1919년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가진 ‘3ㆍ1 기미 독립선언’의 모태가 된 셈이다.
#독립운동가 이전에 대선사
용성 스님은 출가 후에 27년간 제방 선원을 돌면서 수도에 매진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전에 대선사였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많은 이들이 용성의 제자였다. 제자들의 깨달음을 체크하며 주고받은 선문답 일화는 지금도 한국 불교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1910년은 경술국치(한일병합)의 해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겼다. 용성 스님은 곧장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했다. 세상을 향해 뛰어든 셈이다. 이후 6년간 조선 팔도를 돌았다. 정승이나 판서, 도감사와 고을 수령 방백을 지낸 이들을 만나서 독립운동 참여나 독립자금 후원을 독려했다.
용성 스님의 증손상좌인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은 “시대 사조만 탓하는 그들을 보며 용성 스님은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니라 개벽의 꿈인 대한민국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며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왕이 나라의 주인이지만,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고 말했다.
#3ㆍ1 독립선언 민족 대표, 왜 33인인가
전국을 돌던 용성 스님은 1918년 서울로 돌아왔다. 천도교의 손병희 교주를 찾아갔다. 독립선언 거사에 대해 제안할 참이었다. 알고 보니 천도교는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 천도교의 독자적 차원이었다. 용성 스님은 “강고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사람의 힘만으로 안 된다. 33천(불교적 우주관의 하늘)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표는 꼭 33인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손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도교 30인에, 불교 3인으로 하자고 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천도교의 교세가 압도적으로 컸다.
용성 스님은 “천도교 측에서 독립선언을 할 준비가 다 돼 있음은 알겠다. 그런데 교주님이 불교계를 포용하듯이 기독교계 대표도 포용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동등하게 천도교 11인, 기독교 11인, 불교 11인으로 결정 났다. 그런데 기독교 장로교와 감리교 측에서 각각 대표 11인씩 요구했다. 도문 스님은 “당시에는 하나의 기독교가 아니었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각각의 종교로 봤다. 33인이면 어떻고, 44인이면 어떠냐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불교에서 양보했다.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 두 분만 불교 대표로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장로교와 감리교 합해서 16인, 불교 2인이 참여했다.
일회성 행사일 수도 있었다.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종교계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끝날 일이었다. 용성 스님은 그걸 우려했다. 그래서 동헌 스님을 시켜 일본헌병대에 신고하게끔 했다. 도문 스님은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부른 뒤 민족대표가 잡혀가야 했다. 고초를 치러야 했다. 그래야만 민(民)이 일어설 거라 봤다”고 말했다.
용성 스님은 미리 태화관 기생들에게 민족대표의 신발과 두루마기를 감추라고 지시까지 해놓았다. 헌병대가 오기도 전에 모임이 파하면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민족대표들이 만세를 부를 때,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모두 잡혀갔다. 이를 계기로 3.1 만세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사건으로 용성 스님은 형량 1년 6개월을 포함,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2개월 옥고를 치렀다.
#용성 스님, 북간도로 가다
형무소에서 용성 스님은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 신자가 쓰는 한글로 된 성경과 찬송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출옥 후에 용성 스님은 삼장역회를 조직해 숱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일반 신도에게 참선을 지도하는 등 불교의 현대화,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다. 경남 함양에 농장 화과원도 세웠다. 이런 마을이 곳곳에 세워져야 독립을 위한 근거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일제는 왜색불교를 강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주지 임명권을 틀어쥐고 협박했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 비구에게는 주지를 맡기지 않았다. 용성 스님은 기존의 불교를 버리고 대각교를창교했다. 일제는 사이비 시비를 걸었고, 결국 대각교는 해체됐다.
용성 스님은 1922년 만주 북간도로 갔다. 연길의 명월구에 수백만 평 규모의 농장도 세웠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얻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은 거의 궤멸했다. 뿔뿔이 흩어진 독립군을 모을 근거지가 필요했다. 용성 스님의 명월구 농장이 그 중심에 섰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용성 스님의 그 엄청난 독립운동 자금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 전라도 만석꾼 집안(임동수)과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황실 상궁 몇몇이 후원했다. 용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만주 일대 독립군을 적극 후원했던 만석꾼 임동수의 증손자가 도문 스님이다.
#윤봉길 의사에게 계를 주다
윤봉길 의사는 어떻게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게 됐을까. 그 배후에 용성 스님이 있다. 1930년 서울 대각사에서 윤봉길은 임철호(도문 스님의 부친)와 함께 삼귀의 오계를 받았다. 신라 원광 법사가 화랑에게 주었던 세속 오계와 비슷했다. 용성 스님은 계를 주면서 윤봉길에게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가서 신명을 바쳐 애국충정의 길을 가라”고 했고, 만석꾼 임철호에게는 “아들을 낳아 출가시켜 법을 계승하라”고 했다. 그들이 받은 세간 오계 중 첫째 계명이 ‘나라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라’였다.
법륜 스님은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곧장 상하이로 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만주로, 다시 다롄을 거쳐 칭다오로 갔다. 거기서 1년간 세탁소 노동자로 일했다. 그런 뒤에 신중을 기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 과정을 만석꾼 임동수가 지원했다”고 말했다.
용성 스님은 1만 명의 대한의사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 중 연합군을 창설해 국내로 진격할 계획도 품었다. 그러나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인 제자의 배신으로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조직은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용성 스님은 1940년 입적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다운 주인국이 되어라”“사분오열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메시지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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