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신경림 시인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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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거기에 큰 무덤이 한 기 있었는데, 양지바른 곳이라 포근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 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문청 시절, 충북 옥천에서 열린 지용제에 갔다가 신경림 시인의 육성으로 이 시를 처음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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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거기에 큰 무덤이 한 기 있었는데, 양지바른 곳이라 포근했다. 어른들은 그 무덤이 사람 무덤이 아니라 소 무덤이라고 했다. 묘석도 없고, 묏등마저 평평하게 닳은 무덤. 나는 거기서 정수리가 따끈해지도록 놀았다. 새까만 잔디씨도 손톱으로 훑고, 뾰족한 엉겅퀴의 깃도 관찰했다. 하릴없이 나무 둥치를 돌로 파면 통통한 굼벵이가 구물거렸다. 심심했던 그 언덕을 떠올리면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라는 시를 외고 싶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 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문청 시절, 충북 옥천에서 열린 지용제에 갔다가 신경림 시인의 육성으로 이 시를 처음 듣게 되었다. 연단에 선 시인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시를 암송하셨다. 그 시는 유년의 무덤가로 나를 데려갔다. 마치 비눗방울에 실려 날아가듯이 가볍고 아득하였다.
이후에 내가 시집을 출간해서 동국대 초청으로 만해마을에 갔을 때 시인을 한 번 더 뵈었다. 예리하고 꼿꼿한 자세가 단도처럼 빛나는 시인이었다. 거기서도 시인은 시 몇 편을 암송하셨다. 나는 슬쩍 고백했다. 스물 몇 해 전, 시인의 낭송으로 이 시를 접했노라고. 놀랍게도 시인은 옥천에서 있었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지난 5월 22일 신경림 시인이 별세하셨다. 많은 이들이 ‘창비 시선’ 1번인 ‘농무’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는 ‘파장’의 한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시인의 시를 다시 읽으며, 소외되었던 ‘민중’이라는 단어가 비로소 호명되었음을 본다. 시인은 떠나도, 낮고 가난한 자리에 시는 남는다. 우리에게 신비로운 기억의 영토가 있는 한 그럴 것이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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