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조민석이 지켜온 것
Q : 올해 초,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매년 주최하는 파빌리온 작가로 선정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파빌리온 공개 시기인 6월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나
A : 그러잖아도 좀 전까지 3D 모델을 만들고 있었다. 런던에 제작 인력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현장 조립을 위해 파빌리온의 일부가 영국 요크 지역 ‘스테이지 원(Stage One)’에서 제작 중이다.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공장으로, 비행기 격납고 같은 공간에 온갖 기기와 기술력이 집약돼 있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비롯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올림픽, 엑스포 공연장 등 세계적 행사에 필요한 공간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건축가에겐 흥미로운 놀이터 같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차리고 싶을 정도로. 오늘 저녁엔 에이컴(AECOM) 엔지니어들과 온라인 미팅이 예정돼 있다. 이렇게 신속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2010년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다. 좋은 활력을 얻고 있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대한 내 심정은 뛰어내릴 수 없는 총알 기차에 탄 기분이다. 물론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웃음).
Q : 건축가 조민석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 업무와 별개로 반복하는 일과가 있다면
A : 딱히 루틴은 없다. 집이 사무실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아침 8시 반쯤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걸어 9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구내식당에는 정오가 되기 5분 전부터 배고픈 건축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앞장서는 편이다(웃음). 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갈 때, 내리막길을 따라 노을 진 하늘 아래 펼쳐진 서울 풍경을 보며 머리를 비우곤 한다. 자가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모든 생활은 걸어서 이동 가능한 거리에서 이루려고 한다. 뉴욕 유학시절이나 네덜란드 건축사무소 OMA에서 일할 때도 차 대신 걷거나 자전거를 탔다.
Q : 일과 삶을 잘 분리하는 편인가
A : 잘 안 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덕업일치’의 삶이다. 주말엔 쉬거나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다. 건축 일의 절반은 커뮤니케이션이라 주중엔 미팅 스케줄이 많다. 밀린 설계 일도 들여다본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일’이다.
Q : 아직도 설계가 좋은가
A : 물론이다. 출근할 때마다 신바람 나서 어깨춤 추면서 온다. 일로 쌓인 스트레스도 일로 푼다. 그래서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일로 소모되는 에너지보다 얻는 에너지가 더 많으니 고갈되지 않는 것 같다. 조금 지쳐도 하루나 이틀 푹 자고 나면 힘이 생긴다.
Q : 어린 시절의 조민석은 어땠나
A : 지금만큼 사회성이 좋지는 않았다. 방구석에서 혼자 뚝딱뚝딱 만드는 걸 좋아했다. 예술을 했으면 지금보다 고독했겠지만 나름 잘 맞았을 것 같다.
Q : 부친 역시 건축가였다. 아버지 서재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이 그려진 책을 보고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A : 아버지는 김중업 선생님 밑에서 일하셨다.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모더니즘 특유의 절제된 미학을 추구했고, 주로 실용적 건물을 지으셨다. 그러다 보니 건축이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막연히 미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서재에서 롱샹 성당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건 아버지가 내게 건축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집에 항상 놓여 있던 문화예술 서적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내게 일종의 덫을 친 건 아닐까 싶다.
Q : 뉴욕 컬럼비아 건축대학원 시절엔 책상 밑에서 잠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엄청난 노력파였나
A : 집중을 즐기는 편이었다고 할까. 나를 완전히 잊고 몰두하는 순간이 좋았다. 지금도 그 맛에 산다. 일하며 집중할 땐 밥도 잘 안 먹는다. 그럴 때 있지 않나. 정신 차리고 보니 집은 난장판, 대신 뭐 하나가 마법처럼 ‘짠’ 하고 나타나 있는 순간.
Q : 건축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고 생각된 순간은 언제였나
A : 1993년 뉴욕에서 설계사무소에 다닐 때 일본의 〈신건축〉이라는 잡지에서 ‘미래의 주거’에 관한 설계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됐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일터와 삶터의 구분이 불분명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건축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공모 주제였다. 당시로선 무척 앞선 질문이었고, 그때 낸 아이디어가 ‘부띠크모나코’로 연결됐다. 수직 도시에 여러 커뮤니티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연상한 것이다.
Q : 부띠크모나코는 강남역 인근에 있는 오피스텔 빌딩이다. 상업적 성격이 짙은 공간의 초석이 건축가의 유년시절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A :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세검정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앞뒤로 뜰이 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한 층에 무려 30세대나 거주했다. 몇 호에 누가 사는지 속속들이 알 정도로 이웃과 가까웠고, 긴 복도를 따라 달리기 시합을 했던 순간이 지금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브루탈리스트의 건물처럼 모던한 공간에 정겨운 달동네 골목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당시 기억을 발판 삼아 고밀도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방식을 다양하게 탐구했다.
Q : 화려한 외관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표피 디자인에만 집중한 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A : 강남 한복판 대로변이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을 상대로 마케팅이 이뤄지다 보니 다소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건축이 소모되는 방식까지 건축가가 모두 컨트롤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최초의 의뢰는 좀 더 비싼 값에 임대할 수 있도록 건물 껍데기만 디자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표면이 아니라 구조부터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다. 소위 말하는 럭셔리 주거 상품이지만 똑같은 공간을 반복해 넣는 것이 아니라 건축적 아이디어를 충분히 동원해 보다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Q : 고층 건물에 대한 새로운 프로토타입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A : 매스스터디스의 주된 방향성 중 하나는 반복되는 주거와 업무공간에서 꾸준히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매트릭스 스터디스(Matrix Studies)’라고 부른다. 부띠크모나코는 49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평면으로 조합한 것이다. 건물 가운데를 뻥 뚫거나 정원을 조성하는 등 다이내믹한 구성과 방식으로 사람들이 만나고 마주하길 바랐다. 건축이 하는 일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모여 편히 살고 연결시키는 것 아니겠나. 2층부터 4층을 가로지르는 사선의 흰 콘크리트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건물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다. 탁 트인 느낌의 저층부를 만들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를 20m 간격으로 최대한 벌리려고 내린 선택이다.
Q : 도시 맥락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 역시 여러 프로젝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접근방식이다
A : 개인적으로 서울에 큰 애정을 갖고 있지만, 도시 맥락적으로 조화로운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건축은 균형을 잡는 일이다. 마곡에 설계한 미술관 ‘스페이스K’가 떠오른다. 마곡은 공항과 인접한 관계로 고도 제한이 일정하다. 똑같은 높이의 건물 사이에 들어설 건축물이라면 좀 더 자유로운 형태에 나지막한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맥락을 고려한다는 건 움직이는 과녁을 겨냥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원불교 원남교당’은 스페이스K와는 정반대다. 극단적인 불협화음을 내는 단절된 도시의 문맥을 적극적으로 연결하려 했다. 마치 침으로 혈자리를 뚫는 것처럼 말이다. 내 건축에 대해 강의할 때 조선시대 침술 지도를 보여주곤 한다. 땅도 우리 몸과 마찬가지로 흐름이 있다. 바람길과 물길, 사람이 다니는 길이 그것이다. 물론 지금의 도시는 유기체 위에 기계가 얹힌 형국이지만 예부터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지금은 자동차와 엘리베이터로 도시가 수직 · 수평으로 확장되면서 본래의 흐름이 많이 남지 않게 됐다. 파편처럼 남은 유기적인 부분이 바로 골목길이다.
Q : 원남교당은 무려 7개의 골목과 연결된다. 종교 시설을 짓는 프로젝트에서 이웃과의 연결에 집중한 이유는
A :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원남교당은 본래 조그만 동산 꼭대기에 서 있었는데, 인접 부지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면서 주변이 가로막혔다. 한옥에 둘러싸여 창경궁이 보이던 모습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다. 이 흐름을 살리고 싶었고, 마침 원불교 교리와 잘 맞아떨어졌다. 원불교는 생활 종교를 지향하기에 이웃과의 교류를 중시한다. 그렇게 탄생한 원남교당은 어느 방향에서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부띠크모나코처럼 도심 속 커뮤니티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 건축가가 도시에 무언가 ‘던졌을’ 때 그로 인해 어떤 이용과 만남이 생겨나야 한다고 믿는다.
Q : 건축을 30년 넘게 이어왔음에도 조민석을 젊은 건축가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A : 젊지는 않고, 철이 안 들었달까(웃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계속 공부하는 마음으로 학생처럼 남겠다는 목표가 있다. 매스스터디스에서 ‘스터디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 호기심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건축가로서 내가 돌봐야 할 부분에서는 계속해서 관심을 두려고 한다.
Q : 건축과 돌봄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A :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멋있는 척하는 건 건축이 아니다. 건축은 무언가를 돌보기 위한 수단이다. 이 사회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돌봄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돌봄이란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을 지키는 일이다. 자연, 문화 등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 생각보다 많다. 오늘날 많은 건축물이 돌봄과 관계없이 지어진다. 산업으로서의 건축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싶다.
Q : 건축가로서 당신이 돌본 것이 있다면
A : 한국에 오기 전인 2002년, 김광수 선생님과 함께한 ‘충무로 영상센터 활력연구소’가 생각난다. 충무로 지하철역 환승 통로를 독립영화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다. 젊은 영화제작자들에게 사랑방 같은 공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2017년 공모에 당선돼 공사 중인 ‘서울영화센터’ 역시 예술영화 전용관이다. 할리우드발 상업영화에서 OTT까지 갈수록 한국의 독립영화들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되고 있다. 와해되는 문화 생태계를 지탱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긴 시간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 오설록도 내겐 무척 의미 있다.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과 함께 훼손된 곶자왈을 복원하고, 훼손된 곳을 최대한 활용해 새로운 건물을 집어넣었다. 13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바둑돌을 두듯 하나하나 진행한 프로젝트다. 어떤 건물은 만들어놓고 시간이 지나면 망가지지만 어떤 건물은 자라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Q : 1961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리모델링한 것 역시 그런 돌봄 과정과 맞닿아 있을까? 오랜 기간 훼손되고 변형된 기존 파빌리온(대사집무동)을 원래 의도대로 복원하는 것이 설계의 방점이었다
A : 당초 대사관이 제시한 설계 공모 방향은 대사관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대사집무동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지침이 바뀌었다. 이런 현실 요건을 고려한 것도 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역시 돌봄의 연장선에 있는 건 맞다. 김중업은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근원지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특히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그의 작업 중에서도 높게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당시 건물은 이미 너무 망가진 상태였다. 지을 때부터 엉터리로 공사가 진행됐고, 중간중간 변형된 탓이다. 우리 계획은 구조 보강에 초점을 맞춰 일부분만 복원하는 것이었으나 그 효과와 진정성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결국 파빌리온을 전면 철거하고 원래 의도에 충실하게 새로 짓는 방향을 택했다.
Q : 결과적으로 안전상의 이유로 끝이 꺾여 개조된 지붕은 다시 날렵한 곡선을 갖게 됐고, 공간 확보를 위해 실내가 돼버린 1층은 필로티 구조로 본모습을 되찾았다. 김중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다시 본 것이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됐다고 들었다
A : 기존 파빌리온에 작은 수조가 있었는데, 당초 우리 복원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중업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을 담은 장면을 본 것이 하나의 계기였다. 수조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Q : 앞서 이야기한 프로젝트와 달리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건축가의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다
A : 백지수표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건축에서 파빌리온이라는 건 유토피아적 성격이 강하다. 1914년에 독일공작연맹 전시회에서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가 선보인 유리 파빌리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불시착한 UFO처럼 생긴 건물에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이상향을 담은 완전무결한 공간인 것이다. 나는 반대 노선을 택했다. 파빌리온에 대응하는 한국의 건축 유형은 정자다. 세상과 단절돼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주변과 나누는 대화에 가깝다. 건물 자체보다 건물이 놓이는 장소가 더 중요하다. 보길도의 세연정을 생각해 보라. 사방으로 엄청난 풍경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굉장히 작은 건물 하나로 복잡한 환경에 관여하고 있다. 기존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백지 위에 무언가를 얹는 느낌이었다면, 파빌리온 설계를 앞둔 내 관심은 대상지 주변의 나무와 건물, 바라보기 좋은 풍경으로 향했다. 이런 것을 중심으로 디자인을 시작했다. 완결된 형태의 단일 건물을 중심에 두는 게 아니라 땅의 중심을 비우는 것, 즉 ‘보이드(Void)’를 만드는 데서 시작했다.
Q : ‘군도의 여백’이라는 타이틀에서 ‘여백’에 해당하는 부분 말인가
A : 보이드를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마당’이다. 마당은 정원과 달리 굉장히 실용적이다. 과거 결혼식을 올리고 고추를 널었던 것처럼 여러 이벤트와 생산이 일어난다. 여백은 가운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강당이나 갤러리, 도서관, 티하우스, 플레이타워로 구분된 5개의 구조물 사이사이에도 있다. 여기에 6개의 마당까지 결과적으로 11개의 공간이 있는 거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다양한 일이 일어날 텐데, 그 모든 건 강요로 이뤄지지 않는다. 마치 종교 건축물처럼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자아내는 공간이 있을 것이다. 설계한 건축가의 컬트에 입성하는 순간이랄까. 이 파빌리온은 직접 마주한 순간 곧바로 감탄을 내뱉게 되지는 않을 거다. 파빌리온 자체보다 그곳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될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인스타그램으로 건축이 한 장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하지만 건축을 영화나 전시, 공연, 책과 같은 매체로 본다면 유일하게 다운로드될 수 없는 총체적 경험이다. 사람들이 편하게 들어와 공간을 누볐으면 좋겠다. 파인다이닝의 마스터 셰프가 만드는 시퀀스 같은 공간이 아니라 여러 반찬이 놓인 밥상이다. 취향껏 골라 즐기면 된다(웃음).
Q : 서울영화센터,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등 머지않은 시기에 매스스터디스의 새로운 공공건축물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 집단의 수장으로서 갖고 있는 고민이나 바람을 나눠준다면
A : 창의적인 모임으로서 고갈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 크리에이티브한 공동체로 출발했는데도 유명해지면 뻔한 이야기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속적으로 흥미로운 일을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과 마주하며, 그때그때 작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너무 높거나 먼 목적지는 설정하지 않는다. 작은 산을 넘으면 언제나 또 다른 산이 있고, 그걸 볼 때마다 오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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