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를 만든 여자

김소연 2024. 6.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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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잉크에서 만난 디자이너 이혜미

Q : 공간이 참 멋져요. 승효상 선생님의 건축 사무소 이로재(IROJE)와 협업해 아틀리에 내부를 완성했다고요. 잉크가 어떤 공간이길 원했나요?

A : 해외에 나가면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잖아요. 파리에 가면 ‘파리스러운’ 공간에서, 뉴욕에선 ‘뉴욕다운’ 공간에서 영감을 받듯, 메종 잉크엔 한국적인 무드를 담고 싶었어요. 저희 옷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많다 생각하진 않아 공간 만큼은 우리의 미학을 녹이고 싶었거든요. 특히 이 창호지 문은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집에도 이런 격자 프레임을 쓸 만큼 제가 격자무늬 창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모던한 동시에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죠.

Q : 잉크 옷에 한국적인 요소가 많지 않다 했는데, 이번 2024 S/S 컬렉션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간자 드레스는 한복 치마를, 백은 봇짐을 연상케 했죠.

A : 맞아요. 이번 컬렉션은 아이디어 단계부터 한국의 미를 녹이고 싶었어요. ‘Y for Yesterday’란 테마로 과거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옛것들을 떠올렸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치맛자락처럼 조선시대 회화에서 볼 법한 장면들을 연상했어요. 추억이 겹겹이 쌓이듯 오간자와 같은 얇은 소재를 여러 겹 쌓고, 레이어링했고요. 한국적인 걸 모던하게 재해석하고자 심혈을 기울였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물이죠.

Q : 2023 S/S 시즌, 파리 패션 위크 데뷔 컬렉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카를라 브루니가 등장해 화제를 모았어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요.

A : 파리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선보이는 쇼인 만큼 파리지앵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강력한 포인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결국 카를라 브루니의 라이브 공연으로 이어지게 됐어요. 쇼 시작 5일 전에 극적으로 섭외가 성사됐죠. 사실 파리 패션 위크에 데뷔한 것도 우연한 계기였어요. 당시 잉크의 홍보를 담당하던 에이전시가 서울패션위크도 담당했는데, 마침 서울패션위크가 유럽 최대 패션 행사이자 파리 패션 위크의 공식 트레이드쇼인 ‘트라노이(TRANOÏ)’와 협약을 맺었고, 트라노이에서 쇼를 열 수 있는 브랜드에 잉크가 선정됐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현장 반응을 보고 가능성을 느꼈죠. ‘우리 파리에 진출해도 괜찮겠는데? 도전해볼 만하겠다!’ 그렇게 파리의 문을 두드리게 됐어요. 브랜드가 롱런하기 위해서는 패션 경쟁이 더 심화된 곳, 소위 말해 ‘큰물’에서 놀아야겠다 생각했어요. 제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건 어쩌면 스스로에게 한 채찍질이에요. 세상은 너무 넓고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요.

2024 S/S 컬렉션의 백스테이지에서 포착한 한국적 미학.
2024 S/S 컬렉션의 백스테이지에서 포착한 한국적 미학.
한복을 연상케 하는 2024 S/S 컬렉션의 오간자 드레스.
‘Y for Yesterday’ 테마로 진행된 2024 S/S 컬렉션.
‘Y for Yesterday’ 테마로 진행된 2024 S/S 컬렉션.
전통 창호 디자인을 응용한 메종 잉크의 인테리어.
전통 창호 디자인을 응용한 메종 잉크의 인테리어.

Q : 한국과 해외 시장의 차이점이 궁금해요. 비즈니스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 아시아·유럽·미주·중동 시장 모두 성향이 달라요. 바이어들이 셀렉하는 아이템도 다르고요. 아시아에서는 잉크가 이미 인지도를 쌓은 상태고 유럽 시장에는 진출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일 수 있지만, 유럽에서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잘 드러나는 룩을 중점으로 바잉이 이뤄진다면 아시아에서는 보다 웨어러블한 아이템이 인기가 많아요.

Q : 컬렉션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A : 음…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지 너무 많아요. 처음에는 쇼피스를 만들고 팔로업하는 것만도 힘들어서 쇼피스와 커머셜 라인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디자인 자체에만 집중했어요. 하지만 쇼에 스토리텔링도 부여해야 하고, 전체적인 콘셉트의 흐름도 봐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점차 세분화하기 시작했고, 이젠 프리 시즌도 진행해요. 1년에 두 시즌을 하다가 이제 네 시즌을 전개하고 있죠. 이야기하다 보니 피곤함이 몰려오네요.(웃음)

Q : 국내의 여러 패션 회사를 다녔고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에 모두 경험이 있어요. 소재 개발도 해봤고요. 10여 년 동안 회사에 소속된 디자이너에서 본인의 브랜드를 론칭하기까지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잉크를 론칭하게 됐나요?

A :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지금의 남편이 “넌 네 브랜드 하게 되면 이름을 뭘로 할래?”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전 제 브랜드를 만들 생각이 없다 했더니, 그래도 언젠가를 위해 이름이나 한번 정해보자고 했고요. 그래서 좋아하는 단어들인 ‘잉크’, ‘레터’ 등을 열거했어요. 어릴 적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셨는데 잉크 냄새와 글자들을 무척 좋아했거든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쓰면 단순해 보여서 ‘EENK’로 무게감을 더했어요. 제 이름 ‘혜미(Hye Mee)’와 맞기도 하고요. 그 후 지인들이 여는 플리마켓에서 진주 장식을 단 비니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편집숍을 운영하던 친구가 납품해달라는 제안을 했어요. 그때 브랜드명 ‘잉크’로 로고와 라벨을 만들었죠. 그게 잉크의 시작이에요.

파리 패션 위크의 데뷔쇼인 2023 S/S 컬렉션.
파리 패션 위크의 데뷔쇼인 2023 S/S 컬렉션.
파리 패션 위크의 데뷔쇼인 2023 S/S 컬렉션.
파리 패션 위크의 데뷔쇼인 2023 S/S 컬렉션.

Q : 매 시즌 ‘레터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키워드로 한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어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이유가 있나요?

A : 하고 싶은 것들을 카테고리로 한정 짓지 않고 마음껏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비니는 ‘B for Beanie’, 핸드백은 ‘H for Handbag’처럼요. 처음엔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컬렉팅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죠. 알파벳 순으로 하니 다음 알파벳의 테마도 무엇일지 궁금증을 유발할 수도 있고요.

Q : 잉크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 잉크는 시대적 특성에 맞게 잘 변화해왔어요. 지금도 조금씩 확장하며 성장하는 과정에 있고요. 운이 좋게 변할 때마다 외면당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팔로어들이 생겨났어요. 예를 들어 비니와 백처럼 액세서리만 만들다 레디투웨어를 처음 선보였는데 그 옷들을 사랑해주는 팬들이 새롭게 생겨났듯이 적극적으로 변화를 주도하면서 브랜드 포지셔닝을 잘한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잘해야 할 텐데! 패션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 같아요.

Q :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건데 디자이너 이혜미는 스토리텔링과 팀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같아요. 잉크를 이야기할 때 항상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요.

A : 회사 생활을 오래 해서 혼자 일하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결국 팀워크더라고요. 다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거잖아요. 일하는 스타일도 처음에 고집했던 걸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진행 과정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계속 디벨롭해나가는 걸 좋아해요. 영감을 서로 주고받는 거죠.

Q : 얼마 전 알파 인더스트리, 케이스스터디와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어요.

A : 모두 잉크의 무드와 반대되는 브랜드예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충돌했을 때 나오는 시너지가 좋아요. 비슷한 브랜드끼리 협업하는 것도 좋지만,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소통해가는 과정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Q : 어떤 사람들이 잉크를 입었으면 좋겠어요?

A : 자기 소신이 있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 남한테 보여주기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요. 잉크가 제안하는 스타일링대로 안 입어도 돼요. 그냥 어떤 아이템이든 자신만의 개성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크의 옷을 입은 걸 볼 때 가장 즐거워요.

파리 데뷔쇼는 카를라 브루니의 라이브 공연으로 더욱 화제에 올랐다.
2023 S/S 컬렉션의 백스테이지.
2023 S/S 컬렉션의 백스테이지.
잉크와 알파 인더스트리, 케이스스터디의 협업 컬렉션.

Q : 반대로 사람들에게 잉크의 옷이 어떤 의미이길 바라나요?

A : 질리지 않는 옷. 섬세한 소재와 디테일을 적용해 만들 때 손이 많이 가는 옷들이에요. 우리 디자인팀이 아이템 하나하나 정성을 안 쏟는 곳이 없거든요. 그중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아이템이 재킷이랑 아우터예요. 마음에 드는 패턴이 나올 때까지 무한 수정을 거치죠.

Q : 아우터인 이유가 있나요?

A : 제가 재킷 성애자예요.(웃음) 맨스 재킷에 대한 집착이 있어요.

Q : 최근 맨스 라인을 론칭한 것도 이 때문일까요?

A : 남성복이 더 어렵다는 걸 경험해봐서 잘 알고 있었는데, 맨스 라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니즈가 컸어요. 남성복은 여성복에 비해 아이템이나 소재가 한정적이거든요. 대신 실루엣을 훨씬 잘 뽑아야 해요. 의외로 소재도 예민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제가 워낙 남성복을 좋아하기도 하고, 혼성 패션쇼를 선보이고 싶은 바람도 있었어요.

Q : 남성복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해나갈 예정인가요?

A : 젠더리스 스타일로 만들어가려 해요. 매니시한 실루엣에 시어 소재를 사용하는 것처럼 기존 남성복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소재를 사용하는 식으로 말이죠. 여자가 입고 싶은 남성복!

Q : 마지막 질문이에요. 30년 뒤에 잉크가 어떤 메종이 돼 있길 바라나요?

A : 늘 생각하는 게, 제가 없어도 잉크는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대표니까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언젠가 감이 떨어질 수도 있고, 예측하거나 생각한 것들이 틀릴 수도 있잖아요. 한국을 대표하는 하우스 브랜드 중 하나가 되면 좋겠어요. 디자이너가 바뀌어도 잉크는 남는 그런 날이 오길 바라요.

Q : 한국 패션에 정말 필요한 일이네요.

A : 그게 저희, 잉크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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