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대정신과 영적 전쟁③ 분노와 권력, 건강한 균형 찾기

2024. 6. 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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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 소장(이레문화연구소)

1. 분노: 선악의 경계선에서
분노가 사람을 망치고 있다. 분노가 사회를 망치고 있다. 나아가 분노가 세상(국제 사회)을 망가뜨리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분노인데 이 분노(anger)가 사람 속에 내재해 있으니 결국 사람 문제이다. 인간 안의 감성(emotion)은 긍정 감성에서 부정 감성까지 고루 섞여 있다. 감성 자체를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 없다. 감성이 은혜와 죄 사이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이 감정적 존재(homo emoticus)라는 팩트는 부인할 수 없으니 우선 중립적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

우리의 감성은 선과 악 사이를 오가고 있으며 선과 악에 지배 당하기도 하고 선행과 악행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성경은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도 바울의 절규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이 절규는 거의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육성으로 들린다. 인간 중에서 어느 누구가 스스로 선하다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 말씀이 마음에 울린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 10:18)

인간의 감성은 자연 상태에서 결코 선으로만 향하지 않고 욕심과 욕망에 따라 악으로 빠르게 달려가기도 한다. 극단적 이기심과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 몸은 어쩌면 “피 흘리는 데 빠른”(롬 3:15) 성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성경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교훈한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그런데 인간의 감성 속에 분노가 꿈틀거리고 있으니 좌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2. 분노의 발생과 순기능
분노는 사람 안에 있다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외부로 노출된다. 분노는 화로 불리기도 하는데 한국 정서 속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홧병의 근원이 된다. 특히 엄격한 가부장 사회에서 억눌린 여성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후유증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런 면에서 분노는 어느 정도 개인적 차원이다.

분노의 범위를 확대해 가면 개인, 가정에서 사회로 나간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화는 이미 수많은 개인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분개하는 감정, 즉 사회적 분노, 공분(public anger), 의분(義憤)이 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살펴보면 3·1 독립 운동, 4·19 민주혁명, 6월 민주항쟁, 5·18 민주항쟁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일어난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당시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이 갖고 있었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불평등에 대한 공분(公憤)이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가져온 실체도 분노였다. 세월호 사건에서 비롯된 사회적 분노가 그 시작이었다. 국민들이 느꼈던 자괴감, 실망감, 안타까움, 정권에의 불신과 회의 등이 공분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였던 것이다.

해외 사례에서 보자면 그 예가 다양하다. 195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은 분노가 일으켰다. ‘성난 젊은 세대’(angry young man)라고 불리던 이들은 기성 세대에 반항하여 생의 새로운 출구를 찾고자 했다. 기계문명, 자본주의, 도시문화라는 틀에서 창의적 생활을 이끌지 못하던 기성 세대, 그들에게 젊은 세대는 화날 수밖에 없었다. 그 포문을 연 작품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제목으로 등장했으니 의미는 분명해진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공분의 사회적 사례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흑인해방운동이다. 백인들로부터 받고 있던 불평등, 부당한 인권, 사회적 편견 등이 아프로-아메리칸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M. 루터 킹 목사를 위시한 여러 흑인인권 운동가들은 분노를 사회의식 개혁과 정권 변혁의 힘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청년층들이 표출하였던 기성 세대에 대한 저항은 히피 문화, 팝(Pop) 문화를 통해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었다. 이로서 무분별한 성개방, 자유연애, 마약이라는 후유증을 가져왔지만 미국의 자본주의와 권력 향유에 안주하는 기성 세대와 정계를 깨우는데 한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에서 1968년 일어난 68운동은 기성 세대와 현대판 앙시엥레짐(보수 세력)을 개혁하자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념적으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 색채를 다분히 띠고 있었는데 ‘이대로는 안된다’는 청년의 위기의식이 분노로 표출된 것이다. 이 운동은 과격해진 부분이 있었으나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은 주변 유럽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대서양 넘어 미국에도 건너갔다.

분노는 힘이 있다. 분노는 별 것 아닌 감정 같은데 여기에 구심점이 생기면 어느새 작은 눈덩이가 산사태로 변해 내리달리듯 가공할 세력이 된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분노가 시냇물에서 강물, 강물에서 바다의 세찬 파도로 변해가는 것같다. 분노가 모이면 거대한 역동적 힘을 구가할 수 있다. 그래서 공분이 엄숙하고 준엄한 것이다. 공분은 곧 민심이다. 그러기에 분노는 주권자 시민의 엄중한 심판이 될 수 있다. 이러할 때 분노는 정당하다.

3. 분노의 풍경들: 성경에서
이러한 분노를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어떤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분노가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본다. 우선 개인적 분노에서 공분으로 확장되는 경우다. 먼저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같은 민족의 혈통을 자각한 모세는 동족을 핍박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다. 그 안에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다.(출 2:12) 출애굽 이후 모세는 시내산으로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다.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는 경악스런 상황을 보게 된다. 기다림에 지쳐있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 모세는 그들에게 돌판을 던진다. 죄악을 자행하던 백성들의 악행에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 32:19)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다윗은 어떠했는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에게는 골리앗이라는 엄청난 위력의 장군이 있었다. 전투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다윗이 나선다. 다윗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던 나이다. 그럼에도 그는 적장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개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다윗으로 하여금 결사항전을 일으키게 한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사도 바울은 선교여행 중 아테네를 방문한다. 거리에 설치된 수많은 신전들. 이름도 알 수 없는 신들에게 절하는 정황을 보니 사도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솟아올랐다. 성령의 마음으로 찾아온 곳이 우상 숭배가 가득한 곳이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 17:16)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성전은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에게서 성전의 의미는 퇴색해 갔다. 예배하러 오는 이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사고 파는 일이 성전에서 자행되었다. 이득을 위해 한 일이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으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 예수님은 이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셨다.(요 2:13~17) 예수님의 마음에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다.

모세, 다윗, 바울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행동의 근저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 이 감정은 개인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감정이었다. 이 예들은 감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거룩한 분노(holy anger)이다.

4. 분노의 역기능
분노는 선으로 다스려지면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된다. 역사는 그러한 긍정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긍정의 분노 저편에 또 다른 분노가 있으니 개인과 사회를 패망하게 만드는 경우들이다. 개인사에서 부정의 분노가 얼마나 인생을 망가지게 하는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일상에서 분노, 특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분노조절장애(anger disorder)는 타인을 상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한다. 연인 간에 벌어지는 갈등 때문에 완력을 쓰는 경우 데이트 폭력이다. 이기적인 분노가 상대방에게 해를 입힌다. 그동안의 애증은 분노로 인해 갑자기 폭력으로 둔갑한다. 이유없는 분노가 가정 폭력이 되어 집안을 파괴시키고 명분 없는 분노가 갑질이 되어 직장 사회를 얼룩지게 한다.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은 상태로 가면 상대적 박탈감이 증폭된다. 양극화로 인한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사회구성원들은 얼굴 없는 분노에 시달리게 된다. 사회의 정신건강(mental health)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 다양한 이상행동(abnormal behavior)들이 유발된다. 우울증이나 무기력, 무관심 등이 동반된다. 사회는 활력을 잃어가며 시들어간다. 분노를 살펴보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아니면 정신적 혼란으로 흔들리는지 파악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 사회에 꺼지지 않는 적신호 중에 하나가 바로 분노 수준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공 에티켓은 희미해져 가고 큰소리나 화부터 내는 일이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기선제압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이 상식이 되어가는 사회는 분명 병들어가는 사회이다.

잠재적인 분노는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온다. 예를 들면 층간 소음문제가 심각하다. 보복행동에서 살인 사건으로까지 번지는 사례는 분노조절장애가 원인이라 하겠다. 코로나가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이라면 분노는 마음과 정신의 질병으로 토착화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사회심리학적 데이터를 심각하게 살펴봐야 한다.

산길로 출근하는 교사를 묻지마 살인,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묻지마 살인, 보행자를 묻지마 폭행하는 행위 등등은 자기 안에 해결되지 못한 분노가 일으킨 병리적 행동이라 하겠다. 군중 속의 고독에서 분노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외톨이, 외로운 늑대형 인간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유없는 분노가 사회적 관계로 유도되어 해소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초개인화 사회로 돌입하는 한국 사회에 사라지지 않는 소리없는 분노를 치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최고의 시각에 다다르고 있다.

5. 분노의 대중조작, 그리고 정치화
“남산에서 뺨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한다”는 속담은 분노에도 해당한다. 분노를 그 원인에서 찾아야 하는데 엉뚱한 데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분노의 왜곡현상이다. 여기에 현대 사회 속에 끊이지 않는 헤게모니 전쟁이 들어있다. 분노를 역기능적으로 악용하는 사례이다.

누가 분노를 연출하는가! 모두가 인식하듯 정치가 분노를 연출한다. 정치는 권력 집중화라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속성으로 되어 있다. 정치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전략을 -비록 비열, 야비하다 비난 받더라도- 활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인 분노마저 악용한다는 점이다. 분노의 대중조작(manipulation)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분노를 연출하여 악용한 사례는 오스만튀르크와 나치 독일 정권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오스만튀르크 정권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때를 기회로 삼아 아르메니아 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르메니아족은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민족 종교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튀르키예 영토 안에 살면서 중상위층을 유지하였다. 이슬람 통치의 재건을 꿈꾸던 오스만튀르크 정권은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이 국가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이라며 이슬람 국민의 분노를 도발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반역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100만명 이상 목숨을 잃는 비극을 맞았다. 이 사실은 당시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 렙시우스(Lepsius) 등이 유럽에 증언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위대한 게르만-아리안족 제국 건설이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들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극우민족주의(파시즘)를 부르짖으며 희생양을 찾기에 골몰하다 유대인에게 표적을 맞추었다. 나치는 아르메니아인의 경우처럼 유대인들도 독일 통일에 반대한다는 누명을 씌웠고, 자국민들의 분노를 증폭시키며 사회문제화 하였다. 그 결과 무죄한 유대인들은 재산과 지위를 잃은 채 무자비한 대학살(Holocaust)의 희생양이 되었다.

역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 사실들은 공통점이 있다. 이 사건들이 모두 ‘연출된 분노’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국민은 정치에 속았고 정치는 국민의 분노를 악용하여 정권 유지에 십분 활용했던 것이다. 정치의 야누스적 속성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다. 역사는 증언한다. 조작된 분노는 인종 탄압, 인종 청소 등에 깊이 간여했다는 것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정권은 한국인들에게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지진에 피폐해진 자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을 분노로 연출하여 우리 동포에게 폭발하게 했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 속 분노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사회 집단의 분노도 자연스러운 집단 감정일 수 있다. 분노가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C.G.Jung)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에서 권력이 개입한다면 폭발력을 얻을 수 있다. 정치는 이런 속성을 알고 있기에 정권 쟁취에 분노를 적절히 조작, 연출한다. 이 지점에서 분노는 사회 변혁을 위한 힘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권 투쟁의 희생 제물이 된다. 정치인은 사라지고 정치꾼이 활개치는 비극이 일어난다.

분노의 정치화가 노골적으로 벌어지면 국민을 우민화 하는 악의 한 수가 된다. 분노가 악용 당하지 않게 깨어있는 시민 정신이 살아나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6. 거룩한 분노와 하나님 나라
정치는 끊임없이 권력 쟁취를 위하여 모략을 꾸민다. 그것이 정치의 속성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일은 정치가 지속적으로 그러한 음모와 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저지, 저항, 개혁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선한 분노가 정치에 이용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정치는 표심을 얻기 위해 조작, 연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아가 분노가 단순히 감정 폭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분과 의분으로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대안 사회를 위해 힘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즉 거룩한 분노로 승화되어 역동적 파워를 행사하게 해야한다. 분노도 “그 쓰임에 적당하게”(잠 16:4) 선용되어야 한다. 정치가 국민의 감정을 더 이상 호도하지 않을 때 우리 사회는 진정한 안정과 번영을 맞이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연 국민들의 선한 분노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누가 분노를 먼저 선점하는가, 누가 분노를 요리하는가, 어떻게 분노를 연출하여 정권 쟁취에 써먹을 것인가, 이런 치졸하고 사악한 음모론 및 심리적 조작 기술은 대한민국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국민들의 선한 분노가 복음의 용광로 안에서 다시 건강하고 균형잡힌 집단 감성(public emotion)으로 제련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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