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군인이셨던 민철 아저씨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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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연 기자]
아홉살 때 학교에서 보낸 현충일 편지에 답을 해 준 민철 아저씨가 있다. 반에서 나만 답장을 받아서 선생님이 크게 칭찬해 주셨고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집으로 가져갔더니 언니가 남자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며 마구 놀렸다. 나는 우리가 살던 빌라의 뱅글뱅글 돌아가는 회색 계단에 숨어서 표정을 감췄다.
민철 아저씨는 군인이었다. 현충일이라 학교에서 단체로 쓴 편지에 답장을 해 준 사람이었다. 아홉 살 나는 군인 아저씨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키가 큰지, 얼마나 무겁고 딱딱한 옷을 입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우리를 지켜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아주 멀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24년 전 민철 아저씨의 편지 꾹꾹 눌러 쓴 민철 아저씨의 필체. |
ⓒ 민철아저씨 |
민철 아저씨는 나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다고 했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또 나중에 시간이 나면 여행을 자주 가라고. 자신은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낀다고 했다. 내가 건강하고 지혜 있게 자라나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아저씨의 답장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2학년이면 열 살이겠구나, 라고 쓴 첫머리의 말도 서운했다. 난 아직 아홉 살인 걸. "나중에 글을 잘 읽을 수 있게 되면 책을 많이 읽으라"는 조언도 이상했다. 난 이미 글을 또박또박 읽는 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답장이 왔는데,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80일 후 집으로 간다던 민철 아저씨의 제대 날짜를 세어 보다가 시간이 지났다. 언니가 또 놀리지는 않을까, 멋진 말을 찾아서 민철 아저씨를 감동시킬 수 있을까 걱정하다가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편지는 점점 특별해졌다. 어린 시절의 일기나 자료들은 정말 많이 사라졌지만, 민철 아저씨에게 받은 편지는 스캔을 떠 놓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관했다. 핸드폰을 바꿀 때마다 옮기고, 메일이나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놓는 식으로 아직까지 가지고 다니고 있다. 그리고 가끔 찾아 읽는다.
스무살이 갓 넘었을 때, 민철아 너도 내 나이즈음이었니, 하며 친구처럼 말을 걸어 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민철이가 동생 같았다. 한편으론 지금쯤 마흔이 넘었겠네 하며 그 나이를 세어 보기도 했다. 왠지 키가 크고 잘생겼을 것이라며 상상해 보기도 했다.
중학생 즈음에는 나중에 유명한 사람이 되어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게 되면 민철 아저씨를 찾을 거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민철 아저씨를 크게 부르고, 아저씨가 등장하면 나는 밝게 웃으면서 인사를 해야지. "어떤 마음으로 민철 아저씨를 찾았어요?" 하고 MC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도 정했다.
"그때 저에게 따뜻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아저씨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말을 해주셨다는 걸 알고 있어요. 어린 저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누군가 제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었어요."
건강히 지내라, 책을 읽어라, 여행을 해라, 시간은 빨리 흐르고 소중한 것이다, 그 모든 말들이 영화 속 대사 같고 막연하지만, 우리 엄마나 아빠도 못 해준,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부분을 어루만져준 면이 있었다.
아마 나는 유리병 속에 편지를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내듯, 대상을 상상하며 적었던 편지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로 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 같다. 멀리 떨어진 존재가 보내준 진심.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의미였다. 기적 같았고, 사랑 같았다.
24년이 흘렀다. 민철 아저씨는 무얼 하고 있을까. 사십 대 후반의 안경 쓴 아저씨가 되었을까. 이제 삼십 대 아이 엄마가 된 나는, 여전히 믿는다. 민철 군인 아저씨는 여전히 멋질 것이다. 또, 다짐해 본다. 나도 민철 아저씨처럼 멋진 말을 전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떤 몇 마디는, 씨앗이 되어 한 사람의 가슴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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