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연설문 찢은 하원의장, 코로나 위기 땐 적극 중재 나섰다 [권력 균형추, 국회의장]
당적을 내려놓고 5일 의사봉을 쥔 우원식 국회의장 앞에 놓인 국회 난맥상은 녹록지 않다. 지난달 30일 문을 열어젖힌 22대 국회는 여전히 투쟁 일변도다. 야당이 각종 특검법과 쟁점 법안으로 공격하고, 여당이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방어하는 대치가 반복될 조짐이다. 7일이 법정시한인 원 구성 협상 타결도 요원하다.
이 때문에 국회의장이 얽히고설킨 난맥을 풀어낼 ‘강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새 의장은 여야를 타협과 협치의 공간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며 “현시점에서 의장은 무의미한 방관자가 될 수도, 정국의 악순환을 타개할 키맨(key man)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국회의장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각계에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가깝게는 민주당 의장 경선 과정에서 이런 논의가 불붙었지만, 정파적 이해관계에 치우쳤다는 평가다. “의장은 중립이 아니다”(추미애 의원)라는 주장이 나오는 등 의장 후보들이 경쟁하듯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을 내세우자 내부에서도 “뭔가 잘못됐다”(우상호 전 의원)는 우려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의장에게 요구되는 적극적 리더십이, 특정 정파로의 편승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학과 교수는 “소극적 사회자를 넘어서 여야가 수긍할만한 타협안이나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며 “특정 정파에 함몰되거나 중재자 역할을 외면하면, 의장이 설 자리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의라는 탈을 쓴 강성 팬덤, 포퓰리즘 정치가 기승을 부릴 때 의장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동시에 입법부 수장으로서 대통령과 정부에 때로는 과감한 기조 전환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해외 주요 국가에서는 의회 수장이 정국의 중심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의원내각제인 이탈리아에서는 상·하원 의원과 지역 대표가 참여하는 합동회의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데, 이 과정을 하원의장이 주재한다.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할 때도 상·하원의장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다. 2022년 세르지오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은 조르자 멜로니 총리 지명을 앞두고, 상·하원의장부터 만나 의견을 들었다. 의장은 불신임 카드로 내각을 압박할 수도 있다.
정치 세력 간 합종연횡이 빈번한 이탈리아의 정치 구도에서 각 정파의 수장이기도 한 두 의장은 권력의 균형추 구실도 한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탈리아 정치판에선 언제든 극우파나 포퓰리스트가 급부상할 수 있지만, 대통령·총리 외에 상·하원의장으로 권력이 분점 돼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한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제인 미국의 하원의장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민주당 소속인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은 트럼프 정부의 국경 장벽 예산을 앞장서서 무산시켰고, 2020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의 시정연설 땐 연설문을 찢는 돌출 행동도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에서는 적극적 중재자로 변신해 정부와 13차례 협상 끝에 합의안을 도출했고, 하원 표결을 이끌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선 하원의장의 엄정한 정치적 중립이 중시된다. 찬반 동수가 나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의회 표결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국회 관계자는 “과격하고 치열한 토론이 난무하는 영국 의회에서 철저하게 당파 색을 지운 하원의장은 합리적 결론을 끌어내는 권위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 의장 선출에 당원투표 반영? “어떤 나라도 하지 않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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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국회의장 후보 선출 시 당원 투표 20% 반영’ 방안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어떤 나라에서도 하지 않는,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당원 투표 20% 반영 논의는 지난달 16일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추미애 의원이 낙마한 것에 반발한 당원 약 2만명이 탈당하면서 시작됐다. 사실상 이들을 달래기 위해 만든 조항으로 민주당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져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이재명 대표)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헌법과 국회법 취지에 배치된다고 지적한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국가의 지도자격인 국회의장을 국회에서 뽑으라고 명시한 헌법 제48조 취지와 배치된다”며 “끼리끼리 경향이 강한 소수의 사람이 국회의장을 뽑는 데 관여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각 정당의 원내대표와 달리 입법부의 수장인 의장은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의무가 있다”며 “국회의장 편향성을 방지하려는 국회법마저 사문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회법은 ‘국회의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은 당적(黨籍)을 가질 수 없다’(20조의2)는 조항으로 ‘의장의 중립성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다수당 소속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의장이 당파성을 띄는 것을 보완하려는 취지에서 2002년 도입됐다. 당시 국회법 개정을 주도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취임사에서 “의사봉을 칠 때마다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바라보며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의장이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면 국회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17대 국회의 사립학교법 개정안 직권상정이나 18대 국회의 노조법, 금산분리(금융과 산업 분리) 완화법안 강행 처리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준한 교수는 “국회의장은 스포츠 경기의 심판과 같다. 왜곡된 심판을 뽑으면 편파 판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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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국희ㆍ김정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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