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나쁘게 살기로 했다

전재우 2024. 6. 6.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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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한다.

아이들을 좀 챙겼어야 했다.

해준 거라곤 기껏 숙제를 포함해 아이들이 쓴 글의 맞춤법을 봐주거나 프레젠테이션 문서에 효과를 넣어준 게 전부다.

아, 집에서 조금 먼 미술학원에 다닌 아이의 귀가를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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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우 사회2부 선임기자


과거에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한다. 아이들을 좀 챙겼어야 했다. 해준 거라곤 기껏 숙제를 포함해 아이들이 쓴 글의 맞춤법을 봐주거나 프레젠테이션 문서에 효과를 넣어준 게 전부다. 아, 집에서 조금 먼 미술학원에 다닌 아이의 귀가를 맡았었다. 저녁 식사 약속 때문에 택시로 아이를 데려다주고 다시 약속 자리에 간 적도 꽤 된다. 물론 그마저도 다른 핑계로 빼먹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싫어했겠지만 강압적으로라도 ‘좋은’ 학원에 보내고 성적 관리를 해줬어야 했다. 편법도 동원했어야 했다. 숙제도 대신 해주고 논문이 필요하다면 대필이라도 해서 학술지에 실어줬어야 했다.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전공을 고려해 비용을 들여 필요한 작품을 만들고, 각종 대회에 응모하고, 민원을 넣어 수상 경력을 만들었어야 했다. 원정출산을 할 수도 있었다. 이민 간 외삼촌이 여러 장점을 누릴 수 있다면서 원한다면 와서 낳으라고 권했다. 다 가능한 일이었다. 비밀 아닌 비밀이었고, 지금도 누군가는 암암리에 ‘자행’하는 일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데 부모의 도리고 인지상정이다. 소질과 능력을 스스로 계발하게 하고,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속 좋은’ 바람은 접어둬야 했다. 부동산 ‘갭투자’를 해야 했다. 기회와 정보는 많았다. 서울 반포주공 3단지를 포함해 일산 분당 판교 등에 투자할 수 있었다. 못했든 안 했든 불법도 아닌데 왜 안 했는지.

기자 초년시절 청탁의 세계에 발을 디뎠어야 했다.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장사하는 사장부터 ‘브로커’로 불리는 각종 중개인까지 여럿이었다. ‘봉투’를 주기도 했고, 관공서를 함께 다니기만 해도 되는 쉬운 부탁도 있었다. 어떤 사람과는 성격이 맞아 자주 어울리게 되면서 친해진 적도 있다. 이 사람과 간혹 만나면서 일반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밤의 세계’와 은밀한 뒷거래, ‘그들만의 리그’ 등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선물 받고 필요한 사람을 연결만 해주면 되는 일조차 거절했다. 이른바 ‘전주(錢主)’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굳이 피해 다녔고 외면했다.

직무와 관련해 알게 된 유력 인사와 친하게 지냈어야 했다. 손금이 좀 흐릿해지면 어떤가, 친해지자고 했다면 친구까진 아니어도 허심탄회한 사이까지는 만들었겠다 싶다. 서로의 필요를 적당히 채워줄 수 있을 정도의 관계만 유지해도 됐다. 혹 그 인사가 잘못을 저질러 실형을 받더라도 사면돼 유력한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굳이 거리를 둘 필요가 없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아닌가. 두루 친한 척 지내다 보면 좋은 일도 생겼을 것이다.

잘한 일은 내 덕, 못한 일은 남 탓이라고 해야 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을 때 성과를 부풀려서라도 내 능력을 포장했어야 했다. 조그만 소리로 내가 했다고 한들 뺏긴 공(功)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겸손은 아무도 모른다. 남에게 공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본인들이 잘해서 좋은 평가를 받은 줄 안다. 훗날 뒤통수를 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내 지시가 아니라고 하면 된다. 불법적인 일도 저질렀어야 했다. 걸리거나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끝까지 우기면 뭐 어쩌겠는가. 정 안되면 ‘빽’을 동원하면 된다.

직접 겪은 일에 상상을 좀 섞었다. 아무튼, 그래서 앞으론 다르게 살아 보려고 한다. 이익이 생기는 일을 찾아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공직에 나갈 일은 전혀 없으니 생각을 고쳐먹고 ‘잘’ 살아 보련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살겠다면 어쩌나.

전재우 사회2부 선임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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